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117 천주교 흑역사 (토마스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절하다) 천주교 흑역사 (1900~1910) 명동 성당 완공 당시 명동성당 주교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신부로 제 8대 조선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신부였는데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조선에 있었고 이 시기는 조선 천주교의 흑역사 시기이기도 했던 시기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 국권 상실이 되는데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총독부가 제안했던 특권들(선교사 명의 땅, 주택 소유권 인정, 세금면제) 등을 수용한다. 이같은 일제의 저의를 교회가 모를 리 없었지만 정교분리의 원칙 속에서 현실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선교사들은 총독부에 저항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선교사들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선교사들의 고국인 프랑스 자체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들은 피식민지에 대.. 2021. 12. 28.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정약용의 가족사는 조선 초기 천주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족모두가 조선 시대 천주교 전파의 중심에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계기는? 정약용은 처음에 천주교를 서양의 학문인 서학으로 접하게 된다. 조선 후기 청나라 도읍인 연경에 보낸 사신인 연행사와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만나고 유럽 선교사를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게 된다. 연행사를 통해 수학 천문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한문 번역서를 500여권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조선에 꼭 필요했던 서양의 기술이기에 성호 이익 등 남인을 중심으로 서학이 적극적으로 수용이 된다. 1402년 조선 최고 세계지도 15세기 초 동서양 통틀어 세계 최고의 지도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천원지방' 의 천체관이 담겨있고 모든세계.. 2021. 12. 27. 천주교 제사 허용 언제부터 ? (연도. 미사주 이야기) 천주교 제사 금지령 중국, 조선에서 모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천주교를 믿던 신자들에게 조선 제사금지령이 내린다. '중국의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다' 라고 규정한 것이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선포했다. 그 이후에도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조상제사 금지를 재차 선포하며 갈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논쟁을 몰랐던 조선의 신자들이었다. 조선에 제사금지 규정이 뒤늦게 전달된 이유는? 중국에 알려졌던 마테오 리치의 는 처음부터 제사 금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썼던 천주교 교리서에 미리 적어뒀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텐데 말이다. 이것은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포교 경쟁때문이었다. 중국에 먼저 입성한 포르투갈의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유교 제례를 인정하면서 선교의 전략이.. 2021. 12. 27. 4군 6진 개척 등등 (세종대왕 자주를 위한 사대 정책 이렇게 까지 했다) 기록에 따르면 공녀는 충렬왕 원년 11월 고려시대에 시작된 역사로 고려 공민왕 초까지 80년간 20여 차례 원에 공녀를 보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라 추정한다. 공녀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진 악습 중 하나이다. 명은 원나라의 적폐청산을 정책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통치 시스템은 원을 답습한 경향이 있다. 조선 초에는 말, 공녀, 화자(환관될 사람)를 요구했던 명나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조선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이 순장을 당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명에 지극정성 사대하다. 그런데 애민 제일주의자였던 세종대왕때도 명나라에 공녀를 보냈다. 공녀는 양반이고 평민이고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공녀로 바쳐진 조선의 여인들이다. 세종 시대의 외교 키워드는 '지극 정성으로 명을 섬긴다.. 2021. 12. 24.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