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흑역사 (1900~1910)
명동 성당 완공 당시 명동성당 주교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신부로 제 8대 조선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신부였는데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조선에 있었고 이 시기는 조선 천주교의 흑역사 시기이기도 했던 시기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 국권 상실이 되는데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총독부가 제안했던 특권들(선교사 명의 땅, 주택 소유권 인정, 세금면제) 등을 수용한다. 이같은 일제의 저의를 교회가 모를 리 없었지만 정교분리의 원칙 속에서 현실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선교사들은 총독부에 저항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선교사들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선교사들의 고국인 프랑스 자체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들은 피식민지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던 선교사들이었다.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요청 거절
이 시기의 천주교는 식민지배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태도를 취했다. 1909년 안중군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을때 당시 안중근 의사는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 천주교 신자였는데 안중근 토마스는 처형 전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뮈텔 주교가 이를 거부한다.
다행히 안중근 의사와 친분이 있던 니콜라 빌렘신부가 여순까지 가서 안중근 의사의 고해성사를 집전했고 그로 인해 빌렘신부는 2개월간 고해성사 집전 금지 판결을 받았다.
또한 3.1 운동때 개신교, 천도교, 불교까지 3.1운동에 참가했으나 천주교는 가담하지 않았다. 천주교는 1900~1910년 일제 강점을 방관하고 한국인의 반침략 운동을 억압함으로 일본의 탄압과 더불어 프랑스 선교 우선주의로 인해 한국인의 고통은 외면당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교인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민심도 악화되었다.
당시 명동성당 신도들을 가리켜 조선 백성이 아니라 프랑스 백성이라는 험담도 많았다. 한국 천주교의 초석을 닦았던 뮈텔 주교지만 이같은 안타까운 선택을 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 후에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에 대한 천주교의 잘못을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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