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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명동성당 역사 속 3.1 구국선언 / 정의구현 사제단이 영향받은 해방신학 배경

by 365 ^^ 2021. 12. 28.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추모 미사가 진행되었다. 미사복을 입고 명동성당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를 벌인 천주교 사제들은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독재에서 민주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6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명동성당
천주교의 상징적 건물 명동성당이 지어진 시기는 1898년으로 100년이 넘는 건물이며 근현대사의 상징이자 1970년대 부터 민주화운동의 성지이며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 가난한 자들의 보호처, 용기 있는 자들의 기댈 언덕이었다.

 

**주교좌성당(Cathedral)
주교의 공식적인 자리인 주교좌가 있는 교구 전체의 중심이 되는 성당

 

 

명동성당 역사 

 

명동성당 대지 매입 
1898년 고종 35년에 세워진 명동성당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명례방에 속했던 명동길 언덕인데 1784년 명례방에 모인 정약용, 이승훈, 이벽은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현재 윤지충으로 변경됨) 이 있었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했고 이를 명례방 공동체라 불렀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의 고난을 겪고 나서 1886년 한불 수호 통상 조약체결이 이루어진다.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정약용의 가족사는 조선 초기 천주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족모두가 조선 시대 천주교 전파의 중심에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계기는? 정약용은 처음에 천주교를 서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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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선교의 자유시대가 온다. 당시 조선 교구장 프랑스 블랑주교는 명례방 언덕을 성당 대지로 매입한다.

 

 

조선왕실과 갈등
명동성당은 시작부터 조선왕실과 갈등이 많았다. 명동성당은 경복궁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고 근처에는 조선 초기 왕의 초상화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영희전도 있었기 때문이다. 땅값을 돌려주겠다. 토지 관련 서류를 압류 하는 등 협박에도 블랑주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토지 매입 12년 후 명동성당이 완공된다. 

 

영희전은 결국 명동성당 완공 이듬해에 다른 곳으로 어진을 옮겼다.


12년 걸려 완공된 명동성당 
12년이나 걸린 이유는 성당 건축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당시 한국에는 양옥 건축 기술자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 기술자들을 한국으로 초빙해서 일을 시켰는데 공사중 청일 전쟁이 발발해 중국인들이 귀국하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다시 지어지면서 12년이 걸렸다. 

 

 

명동성당 고딕양식 

첨탑의 종은 프랑스에서 가져왔다.  프랑스 주문 제작후 완공 두달 전 조선으로 운송된 종이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도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가져왔다. 


프랑스 노르트담 대성당으로 대표되는 고딕양식은 높은 천장과 뾰족한 첨탑이 특징이다. 신의 존재라고 여긴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한 양식이라고 한다.  명동 성당의 첨탑의 높이는 47미터나 되는 명동성당을 뾰족집이라 부르면서 수많은 구경군들이 몰러들었다. 

 

고딕 양식 특징 높은 천장
뽀족한 첨탑 47M 높이 

 

명동성당 성탄미사 생중계 중단 계기 
19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는 3선 개헌을 강행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직후였다. 당시 성탄 자정 미사는 tv로 생중계되었는데 1971년 12월 초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태에서 생방송은 정말 좋은 기회였다. 당시 시국 문제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신문 보도조차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생방송에 이런 내용이 나갔다.


또한 하필이면 박정희 대통령은 잠을 안자고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이 발언이 나가자 방송 중지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중계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이 모두 나갔다. 

다음날 담당 pd부터 기술감독까지 관계자들은 모두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그 뒤로 17년 동안 명동성당 성탄 미사 생중계는 중단되었다. 또한 당시 한국정부가 로마 교황청에도 항의를 했으나 교황청은 이 사실을 오히려 김수환 추기경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정의구현 사제단 배경 


주교가 실형을 선고받는 최초의 사건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중앙정보부에 납치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건넨 혐의였다. 이로 인해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한 후 하루만에 지학순 주교는 풀려나지만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선언을 하면서 재구속되었다. 결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주교가 실형을 선고받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내용 4번: 인간의 침해권이 침해되니 반대한다.

 

이 사건으로 주교뿐 아니라 구속된 민주 인사, 대학생들의 석방 요구 민주화 운동이전개되었고 함세웅 신부의 주도하에 전국의 사제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다. 

 

 

 

해방신학 배경 

정교분리가 전통인데 갑자기 바뀐 계기 1962년 ~19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것이였는데 이 회의에서 교회는 사람과 공동체를 위한 자리에 있어야 하고, 신앙의 목표는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해야 하며. 정치와 종교는 협력하여 사회 쇄신에 기여해야 한다. 며 밝히게 된다. 

**공의회
전 세계 가톨릭 교구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 결정하는 회의. 

 

2차 바티칸 공의회 내용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 모두 해외 유학파로 모두 로마나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로 해외에서 공부할때 제2 차 바티칸 공의회 가 열렸고,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그런 소식들을 잘 접하고 서구교단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와 이런 흐름을 주도하게 된 것은 필연적 일이었다. 

당시 큰 조류를 형성한 남미 해방신학은 남미를 억압하고 탄압한 포르투칼, 스페인의 이런 불의한 상황을 외면하고 있던 교회였는데 제 2차 공의회 이후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등장한다. 진보적인 사회참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한국 젊은 사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해방 신학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재정립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3.1 민주구국선언 3.1 명동사건

1976년 3월 1일 정의구현사제단을 포함 약 700명의 천주교 개신교 재야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구속된 민주인사를 위한 미사 봉헌를 계획한다.


1972년 삼월일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기념 미사에서 각계각층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으로 내용이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구속 인사를 석방하며 언론 자유를 보장하라 였다.

 

3.1 민주구국선언 내용에는 긴급조치 철폐, 구속인사 석방, 언론 자유보장의 내용이 있고 

 

그리고 이틀 뒤 관련자들이 줄줄이 검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부는 몇일 뒤 종교행사를 빙자한 정부 전복사건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선언문에 서명한 신부 7명 중 3명이 구속기소, 4명이 불구속 기소가 된다. 이것이 유명한 3.1 민주구국선언 3.1 명동사건으로 유신체제를 최초로 정면 비판한 공개 집회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알린 천주교

1987년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미사에서 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알리면서 이것은 6월 항쟁의 뇌관이 되어 6.10 항쟁까지 이어진다.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시고 강론하신 미사는 박종철 사건으로 분노하는 민심 앞에 횃불을 들어 올린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강론 / 카인과 아벨을 인용해 정권을 비판한 김수환 추기경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8년 2월 24일 전두환 대통령 임기 종료를 앞둔 1987년 12월 16일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 임기기 끝난 후 노년을 대비해 자신의 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노태우 당시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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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세계 정세는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1980년 인권 탄압 중단 촉구 연설 진행 중 군사 독재정권의 무장 괴한에게 피살당하는 일도 있었고 철권 통치였던 시기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왜 종교단체가 나섰나? 
종교 단체가 나설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공산주의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신부들은 공산주의를 응원하거나 지지할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산주의 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인혁당, 민청학년 모두 빨갱이 공산주의로 몰아 처벌했으나 성직자들은 언론, 학생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 조직이 있었고 해외연계도 있었고 신부님들은 독신으로 부양할 가족이나 재산증식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세속의 관점에서 볼때 약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제들이었다.  사제들은 정권의 약점인 도덕성 부족, 결핍을 비판하면서 독재정권에 맞설 강한 전투력이 있었다.  

 

 

6.10 항쟁의 성지 명동성당

사제단의 폭로 3일 뒤에 추가로 고문 경관 3명이 구속됐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문책성 개각을 단행이 되지만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그렇게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다.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 과정 결과 의의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 과정 결과 의의

6월 이전의 상황은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뒤에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발표한 상태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6월 내내 울려 퍼졌던 "호헌철페,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국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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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국민을 향해서 무차별적 최루탄을 쐈고 도시전체가 시가전의 전장이 되어 버렸다.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였고  6월 10일 ~15일까지 5박 6일 간의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되었다. 이에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렀다.  

이때 공권력 투입의 최후 통첩을 전달받은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말을 했다.


이 시기에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고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지키겠다는 수호자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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