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이전의 상황은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뒤에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발표한 상태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6월 내내 울려 퍼졌던 "호헌철페,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87년 6월
4.13 호헌조치
호헌의 뜻은 헌법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언뜻 좋은 뜻처럼 보이지만 전두환의 호헌은 제5 공화국 헌법을 유지하는 간접선거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4월 13일 날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현행 헌법에 따라 정부 이양을 계획한다고 발표한다. 분명하게 헌법 개정은 없다고 선언한 것으로 이는 시민들에게 군부 독재 연장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런 호헌 조치에 국민들은 분노한다. 이에 호헌 철폐 구호를 외치며 학생 시위를 한다. 호헌 철폐의 의미는 국민이 직접 투표할 수 있도록 개헌을 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간선제->직선제) 간접선거는 국민이 아닌 선거인단에서 투표를 하여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으로 1981년 선거인단 선출 방식을 통해 12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6월 항쟁의 시작
6.10 항쟁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 살인 규탄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하루 전날 연세 대학교에서 모인 약2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오후 5시 교내 궐기 대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장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뒤통수를 가격 당해 쓰러진 학생이 바로 이한열 학생이었다. 이한열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었다. 이날도 이한열은 몸이 아파 나오기 힘든 상태였으나 국가를 위한 일이 먼저였던 그는 시위에 나왔던 것이다.
이한열이 최루탄이 쓰러진 날도 전두환은 전당대회에서 군부 독재를 이어가기 위해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가 지명되면서 장기 집권 계획을 실현화하고 있었다.
6.10 국민 대회
이 전당 대회에 맞불을 놓은 시위로 전국 18개 지역에 40만명이 참여한다. 6.10 국민 대회의 의미는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각계각층이 한마음으로 참여했던 시위 단체였다. 6.10 국민대회 시위대는 폭력진압을 하는 경찰에 밀려 명동 성당 안으로 일단 피신한다. 수천 명의 전경들이 성당을 에워싸면서 성당은 봉쇄된다.
6.18일 최루탄 추방대회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내내 어마어마한 양의 최루탄을 사용했고 이 폭력적 무기없이는 지탱이 되기 힘들 만큼 정권이 위태로워 전두환 정권의 다른 이름은 '최루탄 정권'이었다. 최루탄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날 모인 최루탄 추방대회에서는 150만 명이 모여 최루탄 사용금지와 이한열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6월 항쟁 중 가장 최루탄이 많이 사용된 날이 6.18 최루탄 추방대회날이었다.
이렇게 되자 전국적으로 거세지는 시민들의 저항에 결국 한계를 느낀 전두환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전두환이 6월 17일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속에서도 끝까지 시민들은 저항했다.
강경진압을 위해 전두환은 6월 19일 오전에 안기부장, 군, 수뇌부를 소집해서 비상 조치를 전제로 군 병력 배치 전력 계획을 세우라는 비상계엄령 계획 수립 지시를 한다. 19일 오후에는 이한기 총리 서리의 특별담화 발표 " 과격 시위와 집단 난동사태로 법과 질서 회복이 불가능해진다면 정부로서는 불가피하게 비상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에 가까운 특별담화였다.
6.24 영수회담
6월 22일 전두환-김영삼의 회담이 진행된다. 그래서 6월 23일 진행하기로 했던 국민평화대행진을 연기하기로 하고 전두환과 김영삼의 회담을 지켜본다.
6월 24일 전두환을 만난 김영삼의 요구사항은 4.13 호헌 조치 철회하고 직선재 개헌을 요구했으나 전두환은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했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와 상의하라고 했고 끝내 개헌과 관련된 답은 얻지 못했다. 회담 후 김영삼은 전두환이 개헌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전두환은 6.24 영수회담을 통해 개헌 논의 시늉만 했을 뿐 6.26 평화대행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 했던 것이다.
6.26 평화대행진
회담이후 전국 37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발생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경찰 병력이 진압하기 어려운 시위 형태였다.
※ 6월 항쟁에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한 이유
사실 계엄령을 선포를 준비한것까지 파악이 되었는데 6.19 오후 2시 미국의 주한 미 대사가 전두환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의 레이건 친서를 건넸다. 친서의 내용은 시위대처에 자제력을 발휘해라, 정치범은 석방해라, 야당 탄압을 중지해라 , 반대세력과 대화를 재개하라 등의 내용이었다.
또한 뉴스위크, 타임지 등 수많은 해외 언론에 6월 항쟁이 보도되면서 한국이 전쟁이 일어나는 듯한 불안한 정국을 알리고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이런 88 올림픽 취소 우려를 생각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전두환 자체도 광주에서 되풀이 되었던 유혈사태가 되풀이될 상황을 우려와 군내에서 강경진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군내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전두환 자신이 그랬듯 권력을 찬탈당할 수 있는 전두환 배반 가능성의 우려도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었다.
6.29 선언
그리하여 식을 줄 모르는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로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이자 민정당 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국민들에게 직선제 개헌을 발표한다. 시민들은 믿기지 않는 이 소식에 언론사에 많은 전화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6월 29일 마침내 직선제 개헌이라는 열매를 쟁취한 것이다.
만 20세의 꽃다운 나이 정의로운 나라를 꿈꿨던 이한열은 7월 9일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한다. 5시 30분 의식을 잃기 전 이한열 열사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그 당시 신고 있던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는 영화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고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6.29 선언은 누구의 작품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6.29 선언은 노태우와 전두환은 서로 자신 구상하고 선택임을 주장한다. 이때 노태우는 6.29 선언을 독단으로 한것처럼 발표를 했기 때문에 노태우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민주적인 이미지로 부각이 되었고 개헌 이후에 직선제 선거를 통해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보통사람' 이미지를 내세운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헌법이 바뀌었고 이후 헌법은 한번도 개정이 된 적이 없다. 현재 우리의 헌법이 바로 87년 6월 항쟁으로 만들어진 헌법이다. 6월 항쟁이 시민들이 이뤄낸 성취이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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