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2월 24일 전두환 대통령 임기 종료를 앞둔 1987년 12월 16일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 임기기 끝난 후 노년을 대비해 자신의 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노태우 당시 민주 정의당 대표를 대선 후보로 추천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1985년부터 시작됐던 직선제 요구에 더욱 불이 붙기 시작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러던 와중에 남영동 대공 분실에 박종철 군이 끌려오게 된다. 박종철 학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84학번으로 과 대표 학생회장을 맡았고 많은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서 징역과 구류를 살기도 했던 1980년대 운동권 학생이었다.
당시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 위해 그의 대학 후배인 박종철을 경찰은 참고인 조사차 끌고 온 것이었다.
1987년 1월 남영동으로 끌려 온 박종철에게 가해진 10시간이 넘는 협박과 폭행 고문 끝에 박종철 군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참고인으로 연행된 박종철이 왜 죽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는 우발적인 사고처럼 보일수 있으나 전후의 상황을 보면 반드시 필연적 배경이 존재한다. 사건 전날 1987년 1월 13일 당시 김종호 내무부 장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한다. 내무부 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다.
보름 전쯤에 청와대 전두환은 강압 수사를 하더라도 (학생운동) 조직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내라고 직접 지시를 내렸고 전두환 지시 사항을 '3월 개강 전에 이행하라'라고 독려하기 위해 김종호 내무부 장관이 남영동에 방문한 것이다. 바로 그날 밤 박종철이 연행이 돼서 남영동으로 끌려와 박종철은 고문치사를 당하게 된다.
당시 고문 담당 경찰이던 조한경의 진술에 따르면
청와대 지시 사항과 장관의 직접 방문 등이 심한 압박감을 주었다고 진술하며 만약 박종철이 죽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희생됐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경찰 외, 군 보안사, 안기부까지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필사적으로 학생 시위의 배후를 밝히려 했고 이들을 잡으면 특진과 격려금까지 지급하니 부처 간의 공안 수사 경쟁이 일어나 고문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죽지 않았다면 멈추지 않았을 전두환 5 공화국의 고문 수사는 일상화였다.
1987년 1월 운동권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애를 썼던 이유는?
87년 한해 전인 1986년은 서울 아시안 게임(9.20~10.5)이 진행 중이었고 1986년 10월 종합순위 2위로 좋은 성적을 거뒀던 해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에 대한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1987년은 전두환 7년 임기 마지막 해로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해였기 때문에 개헌 투쟁과 민주화 세력 탄압이 1986년 10월부터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전두환은 기회를 보다가 아시안 게임 직후 강압적인 수단으로 민주화 세력을 강경 탄압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1986년 10월부터~1987년까지 다음해까지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전두환의 계획은 퇴임 이후에도 자신이 섭정을 하려던 의도가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 비서실 비밀 문건인 '88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준비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1988년 공개가 되면서 정확하게 알려졌다.
문건 내용에는
당시 여당 민정당이, 최소 2000년까지는 집권을 목표로 후계자를 육성 및 선정 방법도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후계자의 조건은 전두환에 대한 절대 충성 등이 확인되었다.
전두환의 망언
전두환이 이런 망언을 했던 이유는 전두환이 5.18 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한 장본인이므로 한두 명의 시민이 죽는 것에는 무감각했을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알린 사람들
☆ 최초로 박종철 군의 사망 기사를 보도한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신문을 찍고 있는 윤전기를 멈추고 사회면 2단짜리로 가까스로 기사를 내보낸다.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을 검찰이 수사 중에 있다.는 대목을 넣어 구타, 고문 수사 뉘앙스를 주었고 '가난한 집안 출신의 운동권 학생임을 넣어 시국 사범임을 알도록 했다.
당시에는 보도지침이라는 언론 통제가 있었고 이에 대해 기자들이 저항했던 방식이 행간에 의미를 실어 보도지침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사는 한국 언론 100대 특종에 선정이 되었고 이 기사로 인해 경찰은 많은 항의를 받고 기사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변명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였다.
☆ 박종철 군의 사망을 보고 받고 황급히 사건을 처리하려던 경찰의 태도에 고문에 의한 사망 사건임을 간파하고 시신 보존 명령을 통해 훼손을 방지를 했던 당시 서울 지검 공안부장 최환 검사는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을 넌지시 기자에게 알리고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의 사망 사건 정보를 제공한다.
☆ 박종철군의 상태가 이상하자 외부에서 의사를 데려오게 되고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복부에서 수포음이 들리는 것으로 단순 쇼크사가 아님을 눈치챈 의사였다.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 군을 보고 자신이 본 그대로 윤상삼 기사에게 알려 언론이 알게 한 사람이 당시 중앙대 용산병원 교수 오연상 의사였다.
☆ 당시 부검을 맡은 황적준 박사는 경찰 수뇌부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부검기록을 남겨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짐작케 했다. 황적준 의사의 이 기록으로 인해 사건 은폐와 관련 없다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축소 은폐에도 그의 죽음을 알린 제보자들이 있었고 보도지침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연일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사망했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각계각층의 의인들이 힘을 모아 사건을 알리는데 힘썼다.
고문경찰 구속
결국 사건 발생 5일만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고문을 시인한다.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라고 발표하면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린다. 그래서 처음으로 두 명의 고문 경찰이 구속된다.
이 모습은 구속되는 고문 경찰의 신상 노출을 막기 위해 20명의 경찰이 같은 옷으로 동행한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이후 상황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중이던 이부영은 교도관들의 제보로 2명의 고문관 이외에 고문 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 이를 감옥 밖으로 알린다. 사건당시 수사를 맡았던 조한경 경위와 가장 나이가 어린 강진규 경사가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나머지 3명은 책임에서 빠지는 것으로 했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 이야기를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의원이 듣고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이름을 적어 당시 호형호제하던 교도관 한재동에게 전달한다. 이 메모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고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 중에 성명을 발표해버린다.
결국 정부는 고문에 직접 가담한 경찰 3명을 추가 구속하고 사건 은폐 조작한 박처원 치안감 등 3명도 구속시키고 이렇게 해도 민심이 수습되지 않자 개각을 단행한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해임되고 정호용 내무부장관이 김성기 법무부 장관, 서동권 검찰총장이 해임이 된다. 그리고 전두환의 최측근 장세동 안기부장이 해임됐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지만 4.13 호헌 조치 (헌번을 수호한다)를 발표한 정부, 올림픽 등 여러 이유를 들어 개헌 논의 중단을 선언, 기존의 헌법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한다.
2월 7일날 박종철 열사 추도식이 진행되고 일반 시민 7만 2,674명이 국민 추도회 발기인이 참여한다. 또한 3월 3일에도 집회가 벌어지고 이 경험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박종철은 조사받기 전 박종철을 만났지만 박종철이 그 선배의 도피처를 알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고 한다.
박종철이 부모님께 쓴 마지막 편지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이 땅의 현실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고 쳐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 박종철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
[3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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