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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5.16 군사정변 (쿠데타는 어떻게 성공했나?)

by 짱신나^^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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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이란? 

 

박정희 소장과 쿠데타 핵심 세력인 육사 5기, 8기 젊은 장교들이 제2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5.16 군사정변 직전 상황 

4.19 혁명으로 3개월 허정 정부를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의원내각제가 들어선다.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그리고 민주당은 집권 여당이 된다. 이런 내각책임제는 국무총리가 더 큰 권한이 있기 때문에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장면 국무총리는 신파로 집권 여당은 다시 둘로 나뉘게 된다. 

 

쿠데타 발생 일주일전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소장 중심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보고가 이미 들었다. 그보다 한 달 전에 이미 미국의 CIA  보고서에는 박정희가 이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이 내용이 장면 총리에게 들어갔고 장면은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확인을 했으나 별일 아니라고 보고 받고 그냥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시간순 정리

 

5월 15일 11시30분

박정희 소장은 신당동 자택을 나와 쿠데타 사령부 6 관부 사령부-김포의 제1공수단 본부- 해병 제1여단을 만난다.  공수단 500명 해병대 1000명은 서울 도심으로 이동하기 위해 한강 인도교에 도착하지만 다리가 봉쇄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 중장이 보낸 진압군이 있었고 이들은 교전을 한다. 그러나 진압군은 고작 50여명이였고 쿠데타군은 손쉽게 서울로 무혈입성한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진압군인가? 쿠데타군인가? 

쿠데타 당시 총지휘관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내세운 공식 총지휘관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었다. 장도영은 정부군의 육군 참모총장과 쿠데타군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및 계엄사령관으로 양다리를 걸쳐있었다.

 

이후에 일련의 5.16 정변과 관련된 질문이 있었으나 정확한 사실을 회피하였다. 

 

장도영 중장을 총지휘관으로 내세운 이유

그는 친미파, 반공주의자였다. 이유는 박정희 소장은 1949년 남로당 전력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력이 있어서 이런 배경의 장도영 중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박정희 소장의 남로당 전력 무기징역 받은 신문내용

 

5월 16일 오전 4시 15분

장면 총리는 쿠데타 소식을 보고 받고 숙소였던 반도호텔을 나와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한다. 사라진 장면 총리대신 유엔군 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러 갔지만 쿠데타 군 초기 진압을 구상하고 있던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유는 쿠데타의 목표는 장면 총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후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상황이 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또한 장면 총리는 미국과 국내에서도 무능하고, 허약한 지도력으로 평가되면서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고 한국과 미국 양쪽 모두 막을 생각이 없었던 쿠데타였던 것이다. 

 

5월 16일 새벽 5:00 박정희 소장을 앞세운 쿠데타 군은 남산 kbs 방송국으로 가서 전 국민에게 5.16일 새벽 쿠데타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쿠데타 바로 직후 혁명 공약도 발표했다. 

 

혁명공약

5.16 쿠데타 혁명공약 내용
5.16 쿠데타 혁명공약 내용 중 정권 이양한다는 내용

 

또한 육사 생도 800명이 쿠데타 지지 행진을 벌여 사람들 민심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육사 시위를 주도한 것은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육사 11기 전두환 대위였다. 당시 육사 교장은 육사 생도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강력히 것을 반대하자 쿠데타 세력은 육사 교장을 체포한다. 

 

육사 11기 전두환 대위에 의해 주도된 쿠데타 지지 행진

그리고 이들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된다. 이 행진 주도로 인해 전두환 대위는 박정희 소장과 인연이 시작된다.  

 

그리고 쿠데타 발생 50여 시간만에 장면 총리는 나타나고 자신의 모든 지위를 내려놓은 사퇴 성명을 발표한 뒤 모든 정권을 군부로 이양한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창설

쿠데타 이후 실질적인 국가 최고 권력기관은 군사혁명 위원회였고 5월 20일 이 기관은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이름을 변경하고 의장=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부의장= 박정희 소장의 내각을 발표한다. 내각은 모두 군인으로 채워졌고 서울 특별시장, 도지사 등 모두 군인으로 대체된다. 

 

쿠데타 이후 2달이 안돼서 7월 3일에 장도영 의장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된다. 죄목은 정부 주체 세력 암살 시도라는 '정부 전복 음모'였다.

 

이 사진이 군사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들이었다.  역대 대통령들 다있네 

 

쿠데타 이후 정권 이양 번복 과정 

 

1962년 12월 17일 박정희는 63년 8월경에 민정을 이양할 예정이라고 발표

1963년 2월 08일 박정희 "본인은 민정에 참여하지 아니한다" 

1963년 3월 16일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군정을 4년 연장할 것이다.

1963년 3월 26일 미국 정부는 순조로운 민정 이양을 촉구한다. 

1963년 4월 08일 군정 연장을 철회한다고 발표 

1963년 6월 06일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개정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의장 전역

같은 날 공화당 입당 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

1963년 12월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민정 이양 번복 사건 

한미관계에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이 민정 이양 번복이었다. 쿠데타 이후 6월 6일 국가재건 비상조치법을 만들어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최고 기관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해서 장기 집권 독재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던 시작과 과정이 불법적이었던 군부 독재는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불법적인 12.12 군부 쿠데타를 낳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당해야 했다. 

 

[출처 역사저널 그날 2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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