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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7.4 남북공동성명 의의 (최초의 남북 교류 배경 및 한계)

by 짱신나^^ 2021.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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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남북이 최초로 통일 원칙을 합의하고 동시에 같은 날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위해 은밀히 북한에 밀사를 파견했다. 당시 북과 통일 논의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에 해당되었던 아주 위험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공동 준비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보안을 철저히 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일이 잘못될 경우에 청산가리를 먹으려고 알약을 준비해 갔을 정도이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인물로 삼선개헌 이후 김형욱과 함께 내쳐진 인물이었다. 이후에 주일 대사로 파견이 되었다가 끊임없는 충성심을 보인 이후락은 마침내 중앙 정보부장이 된다. 

 

제 6대 중앙정보부 부장 (1970년 12월~1973년 12월) 이후락 

당시 북한과의 관계는 아주 불안한 상태로 청와대를 습격했던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전국적으로 반북 반공 궐기대회가 개최될 만큼 북한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절이다.  

 

7.4 남북공동성명 배경

 

1969년 김일성 암살 계획에서 1971년 순식간에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며 남북의 기조가 급변했던 이유는 국세 정세의 변화가 있었다. 미국 내 베트남 반전 시위운동이 격화되고 있었고 미국이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커지면서 베트남 전쟁을 끝내려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에서 군사개입을 자제하겠다고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톡트린 1969.7.25 

그런 상황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중국이 미국에 외교를 시도하면서 미국와 중국이 스포츠 외교(핑퐁외교)를 통해 손을 잡게 된다. (긴장완화=데탕트 ) 그리고 1971년 4월에 일본 나고야에서 탁구 친선게임을 진행했다.

 

미.중 핑퐁 외교 (친선탁구경기)

같은 해 7월에 키신저(미국 안보보좌관)가 중국을 방문하고 1972년 다음해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냉전 구도에서 벗어나 긴장 완화를 조성한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졌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이후  중국과 미국은 급속도로 개선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북한 , 미국 사이가 긴밀해지며 한국이 소외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71년 7월 베이징에서 미국의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의 만남

 

71년 7월 미국의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만났고 몇일 뒤 저우언라이는 북한에 대화 내용을 전달했고 북한의 요구사항을 중국을 통해 미국에 전달이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한국은 소외되었다. 미국에 중국 방문 전에 한미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거절하면서 한국의 고립을 느꼈다. 

 

 

당시 업친데 덮친 격으로 주한미군 감축이 있었다. 약 6만여 명의 미군에서 약 430000여 명으로 감축이 되어 불안했는데 원활한 미. 중 관계를 위해 한반도의 안정이 필요했던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 시도를 한국에 푸시하는 상황이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71년 3월 27일에 주한미군 제 7사단 철수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간신히 7대 대통령에 당선이 확정되었지만 김대중 야당 후보 또한 선거 유세 때 평화통일을 내세웠던터라남북대화가 내외부적 압력으로 화해 모드가 고려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이 시기에 실미도 사건(1971년 8월 23일)도 일어난다. 

 

 

 

남북 대화 진행 과정 

 

남북적십자 예비 회담(1971.8.20)

1971년 8월 12일 남측의 남북 적십자사 회담을 제안하고 이틀 만에 북한에서 화답이 온다. 그리고 1971년 8월 20일 중앙정보부와 조선노동당주축의 비밀접촉 채널로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이 개최 후 1972년 5월 2일 비밀리에 이후락 부장이 북한으로 방문하게 된다. 

 

이후락의 북한 방문 (1972.5.2)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 지도부장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와 만남을 갖고 그 후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김일성은 호의적이었고 환대했고 6.25와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전하면서 남. 북한의 오해와 갈등을 풀었내는 시간을 가졌다.

 

북한 밀사 박성철 서울 방문(1972.5.29)

그 뒤 3주 후 북한의 밀사도 서울에 내려와 박정희를 만나고 서울과 평양으로 남북 밀사가 수차례 오간 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7.4) 후 변화 

 

7.4 남북공동성명 내용의 핵심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으로 통일하자 ' 였고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북 직통전화가 개통이 되고 군사 도발이 감소되었으며 남북조절위원회 설치 및 북괴라고 부르던 이름을 북한으로 변경하게 된다. 

 

 

 

1972년 8월 29일 적십자회담 전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한 2주 뒤 1972년 9월 12일 북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하자 급변한 남북관계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북단 이후 북한 풍경이 처음으로 생중계
북한 대표단을 맞이하기 위해 판자촌 도색 및 경부고속도로에 자동차 집결, 북측 방문 동안 서울의 야경을 위해 불을 환히 밝혀놓기도 했다.

 

유신헌번과 사회주의 헌법 발표

그러나 7.4 남북 성명 이후 남북관계는 호전되기보다는 더욱 자신의 체제 선언에 열을 올렸고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이 나왔고 같은 날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발표하며 남북 양쪽에서 절대권력을 공식화한다. 

 

유신헌법 주요 내용

  • 대통령 간선제
  • 국회의윈 1/3을 대통령이 임명
  •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

사회주의 헌법   

  •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헌법 1조에 명시
  • 국가 주석제 신설
  •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결국 7.4 공동 성명이라는 평화의 장을 통일의 수단이 아닌 안보. 체제 강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독재체제의 강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1973년 8월 28일 남북 대화 중단 선언을 한다.

 

남북의 절대권력 공식화한 결과

 

7.4 남북공동성명 의의

7.4 남북성명은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교류로써 의의가 깊다. 남북 간에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1990.9~1992.10월 남북 고위급 회담을 실시하게 되고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도 7.4 남북 공동성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7.4 남북공동성명은 1985.9월 20일 실제로 이산가족 상복의 결실을 맺었고 남북관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성명임에는 분명하다. 

 

이산가족 상봉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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