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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버마)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by 365 ^^ 202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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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이라는 이름은 미얀마 (=버마)의 독립영웅으로 우리에게는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묘소는 우리나라의 현충원 같은 곳으로 독립운동가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당시 현지 미얀마 아웅산 묘소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얀마(=버마) 방문 당시 아웅 산 장군 묘역에서 벌어진 북한의 폭탄 테러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목숨을 잃을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우리나라의 정부 각료 1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현장

 

이 사건 이후 우리나라는 준전시태세와 같은 데프콘 3가 발령이 되면서 안보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사건이다. 데프콘 3은 유일하게 두 번 있었는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 이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때이다. 

 

전두환 대통령 어떻게 테러를 피했나? 

1.5M를 남겨두고 폭발이 일어났고 바로 4분 차이로 전두환 대통령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83년 10.9일 미얀마 순방 둘째 날 첫 일정이었다. 그러나 미얀마 외무부 장관의 차가 고장이 나면서 4분이 지체가 되었고 이에 기다리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이 화가 나서 또한 똑같이 4분 정도 지체를 하면서 오기를 부리다가 테러 시간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테러 직후 미얀마 네윈 의장이 찾아와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고 반정부 세력의 소행같다고 추측했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민들이 저항하니 군인들이 무력진압을 하면서 소수민족들이 반군을 결성하던 지금의 시기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폭탄 위치

테러범들은 지붕에 폭탄을 설치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높은 위치이고 금속이 많아 금속탐지기도 수색이 어려움점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대 2KM 거리에서도 작동하는 원격 폭발 장치를 설치했다.

 

테러범이 사용한 폭탄

테러범이 사용했던 폭탄은 파편과 쇠구슬이 퍼지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상용 폭탄 2개와 증거인멸을 위한 소이탄 1개 총 3개의 폭탄을 설치했다. 

 

인마 살상용 폭탄을 사용, 클레이모어 폭탄 약 700여개의 쇠구슬을 발사되고 2KM 까지 날가는 폭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오전 10시 25분에 차량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상태였고 마침 그 시간이 맞춰 태극기를 단 차량 한 대가 지나가면서 테러가 실패하게 된다. 그 차량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차량이었다. 그렇게 이계철 미얀마 대사 차량을 대통령 차량으로 오인하고 폭탄을 터트렸다.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이계철 대사(전두환 대통령과 외모가 비슷) 는 아웅산 묘소에서 사망

 

전두환 대통령은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순방을 포기하고 그 즉시 바로 국내로 돌아왔다. 테러 발생 6시간 만에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다. 이후의 순방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돌아가신 각료들 중에는 많은 엘리트들이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던 사건이다. 

아웅산 테러 순직한 정부요직의 17명
아웅산 테러 순직한 정부요직의 17명

 

 

검거된 테러범 

며칠 뒤 도망가던 범인들은 어부의 신고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고 3명의 테러범이 붙잡히게 된다. 경찰에 사살된 신기철과 진모, 강민철이 생포되었고 자폭용 수류탄인 줄 모르고 사용했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강민철이 배신감에 이들이 북한에서 전두환을 암살하기 위해 왔다고 자백한다. 미얀마 재판에서 둘 다 사형을 선고받고 1985년 진모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수사 협조가 참작된 강민철은 무기징역으로 미얀마 인세인 감옥에서 25년을 지내다가 2008년 5월에 감옥에서 사망한다. 

 

북한 공작원 진모, 강민철

 

미얀마 측이 생각하는 한국의 자작극 근거

미얀마는 한국 조사단의 면담을 10분으로 제안했고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 두 명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 명은 수류탄이 터지면서 오른쪽 손목이 절단되고 시력도 잃었다. 왼쪽 팔꿈치 밑으로 절단이 되어 있었다. 미얀마 당국은 공동수사를 거부했고 우리의 외교관과 관련인들을 모두 출국 금지시켰다. 

 

 

 

미얀마 측의 입장은 이 테러는 한국에서 벌인 자작극이라 생각했고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얀마에서 자작극을 벌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분이 늦은 이유 대통령만 살아남았고 외교 관례상 대통령의 지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팔소리가 나자마자 폭발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오지도 않았는데 나팔을 왜 불었나? 그러나 그것은 시험 나팔소리였다. 

▶해외 순방 작전명이 국화 프로젝트였다. 원래 순방 계획에는 미얀마가 없었다. 이유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추가하며 일정이 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를 추가한 이유는 비동맹 국가(미얀마) 외교전에서 북한을 이기는 것이었다.  

 

 

보복 작전명 : 벌초 계획 

1983년 10월 11일 테러 희생자들의 운구가 도착했고 여의도 광장에서 영결식 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 암살 작전인 벌초 계획을 세우게 되고 전두환의 최종 승인만 남았었으나 대통령은 88 올림픽 개최와 전쟁의 발생 가능성, 미국의 반대, 미국의 LA올림픽 개최 등 줄줄이 큰 행사가 있는 상황을 감안해 승인하지 않는다. 

 

작전명: 늑대사냥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국민 17명이 죽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국제사회에 테러의 전모를 알리며 북한과의 외교 단절, 경제적 제재를 요구하면 북한을 고립시키는 외교전을 펼쳤다. 외교전 '늑대사냥' 이후 60개의 서방국가들이 북한과의 교류를 중단 및 축소시켰다. 3개의 나라는 미얀마 또한 북한 대사관을 퇴출시키고 외교 단절을 선언했다.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국내는 반공 여론이 고조되면서 전두환을 곤란하게 했던 국내의 부정적 이슈들이 모두 묻혀버렸다. 

 

 

일해재단 

아웅산 묘소 테러의 희생자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었으나 비자금 조성에 이용되면서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현재는 세종연구소로 바뀜.

 

 

미얀마 아웅상 테러 위령탑 

임진각 들어가는 입구에 각종 위령비들이 있는데 그중에 미얀마 아웅산 테러 당시 희생당한 17명의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이다. 

 

미얀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비

높이 17m

탑신과 계단 17개

17은 17인의 희생자들을 의미한다. 

4기의 청동군상 조각: 외교를 통한 조국 번영, 국력신장, 민족화합 

 

탑신 아래 희생자의 17기 이름 새겨놓았다.
미얀마 아웅산 순교외교사절 위령탑 1984년 10월 9일 건립

 

* 버마와 미얀마는 무슨 차이?

 

1980년대 이전 세대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라는 명칭이 더 친숙하다. 그 이유는 미얀마의 예전 국호가 버마이기 때문이다. 버마라는 국호는 1886년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이 영국령 인도에 편입시키면서 '버마'로 공식 지명했다. 그래서 1989년 이전까지 버마로 불리다가 미얀마의 군사 정권이 영국 식민지의 잔재를 제거하고 버마족(72%) 이외의 미얀마의 소수 민족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미얀마'로 국명을 변경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정권 등의 민주단체들은 이를 거부하며 여전히 버마라고 사용하고 있고 현재까지 버마와 미얀마 국호가 국제사회에서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얀마 쿠데타 역사 정리 (영국 식민지배 ~현재)

 

 

미얀마 쿠데타 역사 정리 (영국식민지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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