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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by 365 ^^ 2021. 12. 27.

정약용의 가족사는 조선 초기 천주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족모두가 조선 시대 천주교 전파의 중심에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계기는?
정약용은 처음에 천주교를 서양의 학문인 서학으로 접하게 된다. 조선 후기 청나라 도읍인 연경에 보낸 사신인 연행사와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만나고 유럽 선교사를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게 된다. 연행사를 통해 수학<기하원본> 천문학<천문략> 과학기술 <기기도설> 등 다양한 분야의 한문 번역서를  500여권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조선에 꼭 필요했던 서양의 기술이기에 성호 이익 등 남인을 중심으로 서학이 적극적으로 수용이 된다. 1402년 조선 최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5세기 초 동서양 통틀어 세계 최고의 지도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천원지방' 의 천체관이 담겨있고 모든세계는 중국 영향아래 있다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도 담겨있다.

 

중국적 세계관이 담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마테오리치의 포교 수법 
이 지도가 그려지고 200년 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흔들린다. 1603년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소개된 <곤여만국전도>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상상도 못했던 신대륙이 등장했고 지구는 둥글다는 대지 구체설도 담겨있었다.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마테오 리치였다. 마테오리치는 천주교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고 동양인에게 생소한 자명종, 오른간, 천체망원경등을 물품을 소개했고 다양한 분야의 서양 과학 기술서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천주실의>와 함께 중국에 선물한다.  

 



마테오 리치가 속한 천주교 수도회 중 예수회는 선교사들에게 신학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등 여러가지 다양한 학문을 교육했고 마테로 리치는 신학자이자 과학자이기 했다. 이것이 예수회의 포교 방식이었고 이런 방식은 조선에도 그대로 통했다.

 


호기심이 많은 조선의 실학자들은 거부감 없이 서학과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시 정치적 우세의 노론 주도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었고 상대적 약세의 남인은 실학과 서학을 받아들여 기존의 현실을 바꾸고자한 욕구가 강했다. 



정약용 형제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시기 
1784년 큰 형수 제삿날 참여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는데 큰형수의 동생 사돈 이벽(처남)을 만나게된다. 돌아오는 길에 배에서 사돈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이벽(1745~1785)
정약용의 사돈으로 조선 천주교 초기 신자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이다. 

정약용 가계도


조선이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  

천주교의 가르침 부모에게 효도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과학기술은 발달이 되어 있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초기 양반 사대부부터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인 것도 이런 보유론 때문이었다. 

**보유론이란? 
천주교가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고 보는 이론

 


정약용과 형제들 세례받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에게서 받게된다.  

 

**이승훈(1756~1801)
정약용의 매형으로 한국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으로 정약용 형제들에게 세례를 베풂

 

[영화 자산어보 속 정약용 세례받는 모습]


이승훈은 1783년 중국 사신단에 합류하게 되고 북경 천주당에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된 이승훈으로 세례를 받고 올때 (1784년) 교리서, 십자가등을 가지고 귀국한 후 정약용 정약전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

 

한국 천주교의 특별함
이것이 한국 천주교의 특이점이다. 한국 천주교는 자체적으로 퍼진것이다. 사실 성지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세례를 줄수 없는데  성직자도 아닌 평신도가 세례를 준 이례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종교는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 신도만으로 성장한 조선 천주교였다.   세계 유일무이한 일로 천주교회에서도 이런 특이한 문화때문에 한국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사 금지령에 배교를 택한 정약용과 정약전

1790년 북경에 파견된 밀사를 통해 앞으로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금지를 알린다. 성리학의 나라에 제사 금지가 되니 엄청난 파장이 되었다. 천주교 제사금지는 정약용 형제가 세례받기 70년 전으로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교황청은 이미 제사를 미신으로 규정한 것이다.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믿은 배경은 천주교의 영혼 불멸 사상이었다. 제사 또한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고 정성을 들이는 것이 문화적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탄압사건)  
당시 전라도 진산에 모친상을 당한 양반 윤지충이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다는 무군무부의 죄로 그의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그를 참수시켰다. 윤지충이 대한민국 천 순교자이고 이것이 바로 1791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 탄압인 진산사건이다. 이때 윤지충이 참수 당할때 피가 튄 돌을 주춧돌로 삼아 지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이 바로 전주의 전동성당이다. 

 

참수된 윤지충의 피가 묻은 돌을 주출돌로 삼아 지은 전주의 전동성당.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 사건 이후로 정약용 형제의 결정적 배교 원인이 되었다.

 

정약용이 정조에게 올렸던 '변방사동부승지소' (1797년) 6월 정약용이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 또한 정약용,중형님 정약전 묘지명 중에도 신해년 겨울 이후로 나라에서 서교를 금함이 더욱 엄중해지자 공은 마침내 분명히 서교와 결별하였다. 적혀있다.


조선 사회에서 제사는 양반의 자부심이기도 한 제사이기에 천주교에 대한 반발심을 야기하게 된다. 진산사건 이후 양반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게 되면서 그 빈자리를 중인, 평민, 여성 신자들이 채우게 된다. 이로써 천주교의 성격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된다. 

 



정약종 순교
형제 중 가장 늦게 세례를 받았지만 끝까지 종교 신념을 지킨 정약종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때문에 성직자 초빙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되고 1795년에 주문모 신부(최초의 외국인 사제)를 초빙하게 되고 정약종은 신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가성직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성직을 임명하기 위해 운영했던 제도

 

또한 신도 단체 명도회(1795년) 결성해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천주교 평신도들의 단체에 초대 회장으로 정약종이 임명되면서 그렇게 순교의 길을 걷게 된 정약종이다.

 

정약종은 하늘을 보며 참수당했다.

 

1801년 신유박해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800년 11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그래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라고 볼수 있는 노력 세력을 전면에 배치하고 남인 축출에 나선다. 1801년 천주교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죽게 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 승하 후 11세의 어린 순조 즉위 후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대리 정치

정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로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 즉위시 반대 세력이 바로 노론 벽파인 정순왕후의 집안이었다. 천주교 탄압은 결국 남인에 대한 정순왕후, 노론의 정치 보복이었다. 

책롱사건 (1801년 2월)
정조 승하 이후 정약용 삼형제도 정치적 탄압을 예상하고 형제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약종이 집안에 감춰둔 천주교 성물과 서적을 농짝에 넣어 옮기다가 발각되니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가족이 결국 국문을 당하게 되고 정약종은 끝까지 죽음을 선택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배교를 택한다. 형제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동생 정약용을 살리기 위해 정약종과 정약전은 필사적으로 동생의 배교를 증언했다. 결정적으로 정약용,정약전의 배교 사실을 담은 정약종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황사영 백서사건 (1801년 9월)
황사영은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데가 체포되는데  황사영의 몸속에서 백서가 나온다. 내용은 사람들이 죽고 있으니 군함과 군대를 요청한 내용이 들어가있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

 

**황사영(1775~1801)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초창기 한국가톨릭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

이에 매국의 죄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정약용, 정약전에게까지 여파가 미친것이다.  정약용 형제들은 고문을 당한 뒤 강진,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로 인해 정순왕후때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면서 다섯 가구가 서로를 감시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100년간은 천주교에 대한 엄청난 탄압이 이루어진다.


**오가작통법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으로 범죄자 색출, 세금징수 등을 꾀하기 위한 목적 

 


병인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죽고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때까지 이어진 천주교 탄압이다. 그래서 순교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전국 곳곳에 천주교 순교성지가 존재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



조선 후기 삼정 문란이 극심해 백성들의 고통을 보기 힘들었던 정약용 형제들은 개혁을 통해 나라를 바꾸려 했기때문에 서양 과학기술을 통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어 천주교를 받아들인 요소였을 것이다. 

 

나라가 품어주지 못하니 하느님을 구원으로 삼는 백성들이 증가했던 시기이다. 

 

정약용 , 정약전 유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목심심서><경세유표>등의 엄청난 양의 책을 집필한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게 된다.  그러나 두 형제는 끝내 만나지 못한다.  유배 후 16년 뒤에 형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사망하고 정약용은 2년 뒤에 유배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상. 종교 갈등 이면에는 권력 다툼이 항상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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