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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4군 6진 개척 등등 (세종대왕 자주를 위한 사대 정책 이렇게 까지 했다)

by 365 ^^ 2021. 12. 24.

기록에 따르면 공녀는 충렬왕 원년 11월 고려시대에 시작된 역사로 고려 공민왕 초까지 80년간 20여 차례 원에 공녀를 보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라 추정한다. 공녀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진 악습 중 하나이다. 명은 원나라의 적폐청산을 정책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통치 시스템은 원을 답습한 경향이 있다. 조선 초에는 말, 공녀, 화자(환관될 사람)를 요구했던 명나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조선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이 순장을 당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명에 지극정성 사대하다.
그런데 애민 제일주의자였던 세종대왕때도 명나라에 공녀를 보냈다. 공녀는 양반이고 평민이고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공녀로 바쳐진 조선의 여인들이다. 세종 시대의 외교 키워드는 '지극 정성으로 명을 섬긴다'였고 이것이 명에도 인정이 되어 세종 33년 재위 기간동안 다섯황제(명나라 5황제)를 지성으로 섬기겼고 한다.

 

세종실록에 실린 내용

 

명나라 공물로 이것까지 요구?
이때 명 황제를 위한 필수 조공품이 해동청(매)이 있었나 자신보다 큰 먹이감을 낚아채는 해동청 매는 잡기가 어려워 당시 감사 수령 절제사등 조선 관료들의 주요 업무가 해동청 잡기였다. 해동청은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매로 함경도와 연해주 일대가 서식지였고 잡기가 어려워 명나라에서 직접 잡기 위해 수백 명의 채포군을 보내기도 했다. 

 

 자신보다 큰 먹이감을 낚아채는 해동청

 

명나라 사신 윤봉의 만행

명나라 사신으로 윤봉이라는 사신이라고 매를 잡겠다고 와서 민가에서 개를 징발하거나 민가에 폐를 끼쳤고 각종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세종실록 기록에 보면 윤봉은 그 가족 삼대를 추증해 주기를 요청해서 이를 수락하고 윤봉에게 각종 뇌물을 주기까지 했다. 

 

당시 조선의 왕이 직접 맞이할 정도였는데 공식 조공 외에도 다양한 뇌물을 요구하는 등 명나라 사신의 횡포는 극심했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으로 온 사람들의 혈통은 조선인으로 주로 환관으로 명나라에 끌려갔던 조선인이 명나라의 사신이 되어 파견된 것이었다. 조선에서 환관으로 간 대부분은 평민 출신으로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출세해 고향에 돌아온 상황인 것이었다. 과거의 울분을 풀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였기에 조선에서는 뇌물을 주면서 그 사신의 마음을 달래는 것 밖에 없었다.

 

이런 조선출신 명나라 사신은 조선의 입장에서 골치거리이기도 했으나 외교 무대에서는 조선의 조력자이자 첩자이기도 했다. 

 

 

세종 이징옥 처벌 강행

윤봉의 만행에 그 지역 관원인 이징옥이라는 사람이 이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다. 잡은 개를 돌려줬고 잡은 해동청을 누락시켰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 보고를 받고 직책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내려했는데 윤봉이 이상하게 용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그러나 세종의 반응은 '사신을 속인 것은 하늘을 속인 것과 같다'고 하여 처벌을 강행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
당시 명나라 영락제는 팽창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세종이 상대해야하는 명나라의 상태가 가장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다. 국경 확보를 위해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던 영락제 시기였기에 조선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세종에겐 외교적 선택의 폭이 좁았을 것이다. 

 

영락제 업적
지도에서는 명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명의 힘이 미치고 있던 시기

조선에 공녀를 처음으로 요구한 사람이 바로 영락제이고 조선 태종때 영락제는 무리한 조공을 요구했었다. 그 이후 명의 황제는 팽창 정책을 펼치지 않아 명나라 선덕제 때 공녀 53명이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세종은 영락제 사후에도 명의 사대 요구를 다 받아줬다. 

당시 조선은 신생 국가로 작은나라 조선의 길목을 거대제국 명이 막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과의 관계에 따라 신생왕조 조선의 운명이 달린 상황이었다.  세종의 사대가 과했나, 적절했나, 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조선 외교는 사대에서 출발했다. 

 


세종 북방개척 여진족 정벌 (파저강 전투) 
1432년 12월 만주 휘하 여진족 기병 400여명이 평안도 여연군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인 53명을 살해 77명을 납치하고 말과 소를 약탈하면서 그 피해는 심각했다. 결국 여진족 토벌을 명하는 세종이었다. 조선군은 여진족의 주거지인 파저강 일대를 공격, 여진족도 반격에 나서면서 조선의 최첨단 무기인 화포까지 총동원한 최윤덕이 이끄는 전투에서 여진족 포로 248명 사살 183명 아군 사상자는 단 4명으로 조선의 압승이었다.

 

 

 

세종의 북진정책
평안도 여연군은 나중에 4군의 시초가 되는 곳으로 방어가 힘든 곳이다. 당시 조정의 중론은 백두산~마천령까지 끊어서 여기까지만 방어하고 위쪽은 공지로 놔두자는 공론이었으나 세종대왕은 단호히 옛날부터 내려오는 조종의 옛땅을 헛되이 버릴수 없다고 하여 북진 정책을 확고히 추진한다.

 

백두산~마천령 까지만 방어하자는 중론 

 

당시 여진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로켓포와 같은 무기 주화(달리는 불)로 불리다가 나중에 신기전이 된다. 큰 것은 길이가 약 5m 60cm 정도로 사정거리가 1~2km로 15발을 동시에 쏴서 100발씩 쏘는 그 당시로써는 최첨단 무기로 이것이 완성되는 것이 세종 30년때이다. 세종의 4군 개척때는 사용하지 못했으나 꾸준히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켓포와 같은 무기 주화(달리는 불) 나중에 신기전으로 발전



세종 4군 6진 개척 의미

 

중요한 것은 세종때 개척한 4군 6진의 모습이 지금 우리나라의 국경선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4군에는 최윤덕이라는 유능한 무장이 있었다. 

 

4군 6진의 모습은 현재의 국경선과 거의 비슷하다.

6진을 개척할때는 문신 김종서가 파견된다. 여기에는 세종의 깊은 뜻이 있는데 두만강 쪽 국경을 어디로 잡을 지는 연구가 필요했는데 역사속에서 가장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던것이 고려때 윤관의 동북 9성이었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에게 고려시대 윤관이 쌓은 9성의 위치를 파악하게 했던 것이다. 단순히 땅만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6진 지역이 조선의 땅임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근거를 찾으려했던 것이다. 

**동북9성 고려 시대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며 세운 9개의 성 

문신 김종서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어 윤봉으로 인해 유배당한 이징옥을 함께 파견한다. 이징옥은 인근의 여진족에겐 맷돼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맹장이었다. 학식과 전략에 능한 김종서와 행동대장 이징옥을 함께 파견했다. 

 



당시4군 개척의 위험성 
두만강쪽의 6진은 명과 떨어져 있어 영토확장이 쉬었으나 압록강 쪽의 4군 개척은 아주 민감한 문제로 조선의 칼끝이 명으로 향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선이 군사작전을 펼치기에 어려웠던 상황으로 요동에 명나라 사령부까지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지극정성 사대로 쌓은 명과의 신뢰 덕분에 명에서도 여진족을 몰아내는 조선의 군사작전을 허락했던 것이다. 

 

4군 위치

 

세종 ! 명에 사대한 이유

세종의 지극정성 사대는 고려때 역사적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을때 많은 공물을 요구받았고 내정간섭까지 받았었다. 이에 세종은 명에 대해 사대를 하면서 관계를 안정시키되 명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지극한 사대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내정간섭의 근원을 차단하고 세종 자신의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자주 정책 

▶15세기 세종의 자주 정책으로 대표되는 것이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이 사대주의자였다면 자주적인 문자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지성으로 사대를 하며 중화의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유독 언문(문자) 만을 우리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헤괴한 일이다 하여 신하들은 극심히 반대했다. 

사실 이 논쟁은 훈민정문 창제 전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될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로 번졌을 것인데 그동안 지성으로 사대한 세종이었기 때문에 당시 누구도 세종이 중국에 사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못하며 신하들의 반대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볼수 있다. 

▶ 또한 한양을 중심에 놓고 1442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달력 칠정산 역법서를 만들면서 시간의 주권을 찾은 조선이기도 했다. 
농사직설 -농민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농서
▶우리 주변에 나는 약재를 가지고 처방전을 만든 향약집성방이 있다.  
아악의 기초를 확립 및 종묘제례악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고 하며 음악을 재정리했다. 

15세기 세종의 사대 정책은 본래 외교의 방편이자 정책이었던 것으로 강대국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들이 모여있는 국제질서 속에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세종이었고 세종의 사대를 잘 활용해서 조선의 영토를 넓히고 자주적인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자주를 위한 사대였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이면에는 많은 조선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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