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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영도다리 초량왜관 수안역 부산의 역사현장들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회]

by 짱신나^^ 202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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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회]
 
 오늘의 방문지: 부산 태종대/영도대교/동래구 수안역/용두산 공원
주제: 임진왜란 침략의 관문 부산 
     
    출연자: 조진웅, 산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에 교류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침략의 관문이기도 했던 곳이다.

 

 

태종대 영도 등대에서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 -영도 
(강다니엘이 부산 영도 출신이라고 하네요 )
 
1592년 4.13일 부산에 상륙한 700여척의 왜선에  만 팔천 여명의 왜군을 싣고 가장 먼저 침략한 곳이 이곳 영도였고 한반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그때 부산의 무사 정발 장군이 영도에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사냥 중이였는데 이를 보고 부산 진성으로 들어가 대비를 했다. 임진왜란 첫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600여 명의 병사와 정발 장군은 장렬히 전사하고 부산 진성을 지켰다.
 

 영도대교  = 영도다리 

국내 유일의 도개교(열리는 다리)/매일 낮2시에 들림

6.25 전쟁 당시 대통령이 내려와 있고, 임시수도에 미군이 지원해주고 안전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몰려든 480만 피란민들은 부산과 영도를 잇는 다리 영도다리에 모여 자신의 가족들을 찾았다. 당시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영도다리였기에 난리통에 헤어진 가족들은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다급한 약속을 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Q.영도 다리를 왜 열리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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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일제 강점기 때 큰 배들이 군수 물자를 싣고 지나가기 위해 상판을 들어 올린 도개교를 만들었다. 영도에서 만들어진 군수 물자들이 영도대교를 거쳐 부산역으로 이동하고 이것이 강제 징용된 젊은이들과 용산역에서 만나 신의주 이동하여 중국과의 전쟁에 사용되었다. 
 
 
일본은 중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물자가 부족했던 일본은 공출을 시작했다. 무기 제작에 필요한 쇠붙이들,요강, 놋그릇,수저 가리지 않고 빼앗아가지 시작한것이다. 놋그릇을 빼앗겨 국과 밥을 담을 그릇이 없어 도자기 공장에서 그릇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나 이 도자기 그릇을 홍보 수단으로 사용됐다.
 
도자기에 공출보국라고 쓴 후에 공출을 정당화하는 홍보용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래구 수안역 

 
 
임진왜란 당시 부산성을 함락한 일본군이 동래읍성을 쳐들어 온다. 군,관,민이 모두 싸웠던 동래읍성 전투의 흔적이 지하철 수안역에 있다.  이곳에서 동래읍성 전투중와 관련된 유골, 갑옷, 무기등이 다량 출토했다. 
송상현 동래부사의 수자기
 
 

동래 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수안역 안에

수안역 안에는 동래읍성 전투에 관한 역사를 배울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동래읍성을 재현해 놓음

임진왜란 초기 격전지였던 동래읍성은 당시 성을 이끄는 이각 이라는 육군 책임자가 있었으나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간다. 이에 뒤 이어 책임자로 부이한 사람은 동래 부사 송상현이였고 동래읍성 전투에서 끝까지 일본군에 저항하다 전사한다.

일본군의 적장이 메세지를 보냄 왜군의 적장은 동래읍성 앞에서 송상현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
 
 
송상현 부사가 일본군에 다시 보낸 메세지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이에 왜군이 동쪽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침입했고 안에서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치열히 싸웠고 전세가 기울어지니 송상현은 학이 그려진 문관 옷을 입고 누각에 올라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가 왜군이 오자 북쪽으로 4번 절하고 순직했다고 한다.
 
이각은 도망가는 도중에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발각되서 참수당했다. 
송상현이 부채에 남긴 부모님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

 

고립된 성을 적군이 달무리처럼 포위하였고 큰 진영에선 구하러 오지 않는데 여기서 죽게 되니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해자 발굴위치 
 
Q.해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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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성을 쌓을 때 적을 막기 위해 성 문 앞에 창호를 파 놓는 것으로 방어용 물구덩이다. 
 
그러나 이 해자에 격열하게 싸우던 동래 주민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들이 해자에 묻히게 됐다. 적을 방어하기 위한 참호가 백성들의 무덤이 됐다. 
이곳에서 다섯 살 짜리 어린아이 인골, 머리가 두 번이나 잘려나간 여인의 두개골등 수많은 사람들의 유골들이 발굴이 됐다. ㅠㅠ
 

임진왜란의 참상을 알 수 있는 장소
임진왜란의 참상을 알 수 있는 장소

용두산 공원 

초량왜관 (조선후기)

태종 때 무질서한 왜구들을 통제하고자 조선정부의 허가하 공식적으로 교역할수 있게 만든 무역처가 바로 왜관이다. (상업도시) 

그러나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 왜관에 일장기를 걸어 놓는다. 그 당시에는 동래안에 부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발전되지 않았던 부산에 왜관을 만들고 이 지역을 일본인 거리로 만든다. 초기 왜관은 약 11만평 정도였으나 강화도 조약 이후 약 500만평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왜관에서 우리나라 기밀을 빼가는 일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총 사령관 역할을 했던 유성룡이 남긴 기록인 징비록을 가져가고, 동의보감도 가져갔다. 우리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우리의 스파이도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침투했었다. 이곳 왜관은 첩보원들의 소리 없는 격전지였다.

 

 

왜군과 왜구의 차이점 

왜구와 왜군은 다르다. 왜군은 일본의 정규군이다.

왜구는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의 해적으로 도시 전체를 약탈한다. 

 

용두산 타워= 부산타워

부산 타워에 올라가면 부산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려다 보이는 해안선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해안선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해안선에 간척 사업을 통해 매립을 해 토지를 넓혀 지금의 부산 해안선이 만들어 졌다.

식민지 근대화론

한국의 성장이 일제 식민지시대 덕분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너무 힘들고 고된 노동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인천항 축항 공사 노역을 했던 김구 선생님은 강제 노역이 너무도 괴로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백범일지 중-

 

조선통신사 역사관

200여 년의 역사 조선통신사의모습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

일본의 경우 무관들이 통치를 했다. 일본의 무신 정권 막부의 수장을 쇼군이라 부르고 새로운 쇼군이 등장 할 때 마다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려면 외국에서 손님이 방문해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요구로 우리 나라에서 파견해준 사절단이 바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의 의중 파악과 포로 송환의 필요성, 양국 간 문화.예술 교류 등으로 양국의 평화를 위해 일본의 요청에 응한 해서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내게 된다.

1607년~1811년까지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12차례의 통신사를 파견했다. 왕복 약 4,000km 소요 시간 10~12개월의 대장정이였지만 조선통신사를 통해 200년간 국서를 주고 받았고 양국의 평화와 문화 교류에 힘썼고 한 차레의 전쟁도 없이 평화의 시대를 유지했다. 

 


 

 

부산 역사 관련 내용▼

6.25 전쟁 흥남철수 작전과 대한해협 해전 in 부산 유엔평화기념관

6.25전쟁 1.4후퇴 이후 피란수도 부산에는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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