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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25전쟁 1.4후퇴 이후 피란수도 부산에는 무슨 일이?[선녀들 리턴즈 22회]

by 365 ^^ 2020. 7. 31.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2회]


오늘의 탐사지: 부산 (영도 다리-40계단길-40계단 문화관-비석문화마을-최민식 갤러리)

주제: 6.25 전쟁 중 부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1.4후퇴를 중심으로)  

출연자: 육중완


영도 유라리 광장  


부산 '영도'의 이름 유래 

옛날에 이곳에 말을 키웠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애마 중에 '절영' 그림자를 끊고 달린다는 뜻의 그렇게 빠르다 하여 '절영'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있던 곳이라 하여 절영도 ->영도로 바뀐것이다.

영도 다리 

1934년에 만들어진 부산 영도 다리는 6.25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이산가족들이 부산의 영도다리 밑에서 만나자 다짐했던 약속의 장소이다. 

영도 대교 열리는 영상 1탄에 링크되어 있음

제 1호 만남의 광장이였고 그런 만큼 피란민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는데 이곳에 피란민들의 판잣집 촌이 형성되었었다. 

다리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교하촌

700-1000채 가량의 판자촌이 다리 밑에 형성 심지어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정박 중인 배에서 갑판 생활까지 했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직후에  영도 다리에서 가족 집단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도 다리에 잠깐만 이라는 팻말이 붙어있기도 했고 경찰이 수시로 체크해야 했던 슬픈 다리다. 통계에 따르면 1955년에 전국 실업자 수는 200만명 빈민이 1000만 명일 정도 전쟁 직후 당시 남한 인구가 2100만 명 가량이었으니 현재 서울 인구 전체가 빈민인 격으로 전쟁 직후 경제 상황은 심각했었다.

점바치 체험관 

점집 골목

점바치는 점쟁이의 경상도 방언


이곳에 점집 골목이 형성되었는데 헤어진 북의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을지 전쟁터로 간 아들은 살아 돌아 올 수 있을까 등등의 불안한 심리와 불확실한 미래가 만들어낸 점바치 골목이다. 


6.25 전쟁 당시 80여 곳까지 늘어나기도 했으나 지금 남은 곳은 단 한 곳 


40계단길


당시 부산에 모여든 피란민들이 생활 필수품과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곳이자 피란길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내 가족을 본 사람은 없을까?  
 

 만남의 광장이자 영화<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명 장면을 촬영한 장소


부산역에 53년에 대화재가 있었는데 그때 불타서 40계단이 이곳으로 옮겨왔고 1993년 남은 계단 중 하나에 붙여진 이름이 40계단이다.


부산의 또 다른 명칭 '불산'

예전 부산의 또 다른 명칭은 '불산' 이었다. 추운겨울, 불을 피워야 했지만 화재에 취약했던 피란민 촌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에 불이 붙으면 빠르게 모두 옮겨 붙었다. 

19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 

 11월 부산역 대화재 

난로불로 발생한 화재는 14시간 동안이나 계속 됐고 사상자 29명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 현재 가치로 수 천억 원의 피해 액을 낸 대참사였다. 도시 하나를 집어삼킨 화마 이것으로 피란민들이 부산 외곽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40계단 문화관 

부산 피란민들의 삶의 애환을 볼 수 있는 공간


피란민 등록증

부산으로 피란 온 피란민들을 파악하기 위한 등록증으로 구호 물품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문서이다.




국민방위군 사건

6.25 전쟁 때 많은 예비 병력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목숨을 잃었다. 학생을 제외한 17~40세 남성들을 대상으로 약 50만 명을 징집 후 군수품 지급도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중공군이 내려온다. 준비 없이1.4후퇴를 직면하게 된 국민방위군은 '서울에서 부산 구포로' 라는 명령을 따라 걸어서 이동한다.

51년 1월 4일의 옷차림


정부에서 당연히 군수품을 지원해줄 거라 생각하고 행렬에 합류했는데 당시 이들에게 책정된 예산금이 지금 가치로 약200억 원이었다. 그러나 국민 방위군에게는 군수품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겨울의 혹한기에 얇은 옷만 입고 행군하던 국민방위군은 저체온증과 동상에 걸린 사람만 약 20만 명 이상이었고 주먹밥 한덩이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민 방위군에게 책정된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 


1951년에 열린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국회특별 조사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당시 국민방위군 장군과 장교들이 당시 돈 현금 23억 원과 쌀5만 2000섬을 착복해서 팔아버렸다. 결국 관련 책임자 5명은 전부 사형당하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과 국방부 장관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임을 한다. 


혹독한 추위에 행군하다 죽은 예비 병력의 수가 9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국제시장 변천사

일제강점기 
국제시장은 원래 시장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때 일제는 혹시 모를 미국의 폭격에 대비해 미국의 타깃이 될 것 같은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때 찾아온 광복의 순간. 재빨리 철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제는 그동안 수탈한 많은 물건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여비를 마련하고자 노상에 물건들을 깔아놓고 장사를 했던 돗데기 시장이었다. 

돗데기의 2가지 의미

장사꾼들이 서로 사려고 다투는 모습을 비유했다는 설


모두 다 땐다 '장사하려고 많은 물건을 사왔다 에서 도떼기라고 불렸다는 설


광복 직후
돗데기 혹은 도떼기라고 불렸던 국제시장은 광복 직후에는 자유 시장으로 불리다가 부산을 통해 우리나라로 미군이 들어 오니 인터내셔널 시장=국제시장으로 변경된다. 

돗데기시장-자유시장-국제시장으로 변천


당시 국제시장의 점포가 1300개 정도였고 이곳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약 10만명 하루 유동인구가 2만5천명 정도였다. 

깡통시장   

  

국제시장과 양대산맥으로 하나의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깡통시장이 있었다.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의 물자를 취급 통조림을 포함 쇠,철 재질의 군용 물품이 많아 붙여진 이름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은 6.25 전쟁 이후의 부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아미동 비석 문화마을 


옛날에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아직 마을에 남아 계신 분들도 있다. 아미동에 올라가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피란민들이 산에 지었던 판잣집들은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6.25 전쟁을 피해 집을 떠나 부산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산역 앞에 판자촌을 만들어 살았었다.  


아미동 비석 문화 마을이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와서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됐는데 (현재 부산 중구 근처) 평지 와 산지 중 땅 값이 비싼 평지는 일본인들이 차지를 하고 조선인들은 산으로 밀려 났었다.

복병산에 있던 일본인 납골당과 공동묘지를 1907년 아미동으로 이전한다.  아미동은 일본인들이 화장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공동묘지로 사용했던 곳이였다.

 


그 당시 아미동의 분위기는 화장장 때문에 연기와 시체타는 냄새가 가득하고 젯밥을 노리는 까치와 까마귀가 바글바글 했던 곳이다. 너무 을씨년스러웠던 아미동이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이곳이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발생하고 갈 곳 없던 이들은 길거리와 다리 밑에서 팟잣집을 짓고 살거나 노숙으로 전전하다가 산 동네 아미동으로 오게 된다. 계속 밀려 오던 피란민들이 골칫거리였던 부산 공무원들은 부산역을 전전하는 피란민에게 아미동 주소를 주면서 그곳에 가서 살라고 했다.



그래서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피란민들은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묘지와 돌벽, 비석을 주춧돌로 삼아 아미동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 집을 짓고 살다가 바닥을 뜯으면 어느 날 유골함이 나오기도 하고 유골함마저 항아리로 쓰거나 그것을 내다 팔아 생계로 이어졌던 곳이 아미동이다.




비석 문화 마을의 비석은 묘지 앞에 세웠던 비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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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에 있는 묘지 비석들


현재는 근 현대사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마을로 재탄생한 아미동이다. 



감천문화마을 

비석문화 마을과 감천문화 마을은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이다.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

1세대 다큐 사진 작가 최민식


전쟁 후 부산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로 해외 원조를 받는데 큰 기여를 하셨던 작가이다.   

전쟁 후 부산 시민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들, 삶과 인간이 주제였던 최민식 작가의 작품들이다.


작가의 말 

 

가난과 불평등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며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사람의 얼굴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6.25 전쟁(한국전쟁)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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