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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25 전쟁 대한해협 해전 /한국노무단/유모차수송작전 in 부산 유엔평화기념관(22)

by 짱신나^^ 2020.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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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1,22회]

 

오늘의 탐사지: 부산 (동아대 석당박물관- 유엔평화기념관)

주제: 6.25 전쟁 70주년 특집

 

 
 
동아대 석당박물관

 

 서울로 다시 수도를 이전 후 경남 도청과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사용됐다. 

피란 수도 부산
 
6.25 전쟁 중 1.4후퇴 당시 부산은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피란 수도였다. 과거에는 부산을 '임시 수도'라 지칭했으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한 중압집권화 단계의 서울 중앙의 시작에서 바라본 명칭이 아닌 피란 수도로 바뀌었다. 전쟁 이전에는 부산 인구는 28만 이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전쟁을 피해 사람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유엔평화기념관 

 

광복 직후 6.25 전쟁 전 상황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고 광복을 맞이한 기쁨의 그날 

이때까지만 해도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찼던 한반도였지만

38도선으로 미국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 후 한반도는 열강에 의해 둘로 나뉘게 된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차 2차 개최되지만

그마저도 양국의 견해 차이로 결렬되고 3년간의 미소 군정을 지나서 결국 1948년 8월 15일 날 남한만 단독 정부 수립을 하게 되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한 민족이 두 개의 체제로 나뉘는 가슴 아픈 분단의 시대가 시작 됐다. 

 
6.25 전쟁 준비 단계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무력 남침을 준비한 김일성은 전쟁 1년 전 49년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계획을 타진하고 조소 비밀 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으로부터 T-34 전차를 비롯한 무기를 지원 받아 전력을 키우며 남침을 준비한다. 

 
사실 6.25 전쟁 발발 전에도 38선 주변 소규모 총격전은 자주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잠잠해 졌다. 그래서 우리군은 방심하고 있었고 6월 23일 24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국군 병력의 1/3가량이 휴가나 외출을 나갔다. 그 틈을 이용해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다. 
 
 
 
대한해협 해전
 
6.25가 일어나던 그 날 38도 선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그날 부산에서도 전투가 벌어진다. 그것이 바로 대한해협 해전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로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은 특수부대가 후방으로 침투해서 주요 시설 폭파, 요인 암살 등 후방에서 적을 교란 시키는 게 주요 전략이다. 그래서 북한이 부산으로 군함을 보낸 것이다. 그것을 대한민국 해군 백두산 부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막아낸다. 
 
참전 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최초의 군함이 백두산함이었고 6.25일 해군 본부는 북한군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한해협으로 출동해 괴선박에 가까이 접근하니 57mm 포가 우리 배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갑판에는 무장 군인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북한 최고의 특수부대 제 766 독립 보병 연대였다. 6백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백두산함이 맞닥뜨렸다.

 

백두산함 참전용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출격한다. 함장의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 교전이 시작  계속 빗나갔다. 군함을 사 올 때 돈이 없어서 포탄을 100발 밖에 못 사왔던 거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적에게 최대한 근접해 목숨을 건 치열한 포격전을 시작한다.
 
하늘이 도왔는지 포탄이 백발백중 마침내 적함에 불꽃이 일었고 적함을 격침시키고 승리를 이루었다. 
 
아군 2명 전사, 2명 부상 
 
그러나 육지의 전쟁은 달랐다.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되고 정부는 이틀 만에 대전으로 이동 후 한 달 만에  함락되고 대구로 밀려 내려온다. 영토의 90% 가까이 뺏긴 상황이었다. 
 

 

 
스미스 부대 
 
최초의 파병 부대인 미군의 스미스 부대가 있었다. 7월5일 경기도 오산에서 북한군과 전투했다. 그러나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지 못한 탓에 무참히 패배하고 이때부터 6.25 전쟁의 심각성을 전 세계가 깨닫게 됐다. 
 
 
부산이 피란 수도였던 이유
 
일단 후방 지역이라 안전했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가장 먼저 개항했던 터라 항구가 가장 발단 된 만큼 물자와 병력 이동에 유리하고 적에게 역습을 가하기도 좋은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8월18일 부산을 피란 수도로 결정하게 된다. 
 
 
부산 교두보 작전 (낙동강 전투) 
 
이때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왜냐하면 바로 9월 15일이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그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 와중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부산을 지키기 위해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해 방어에서 공격으로 후퇴에서 반격으로 대전환을 한다. 이때 낙동강에서 방어선이 유지 됐기 때문에 인천 상륙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북상하라는 스탈린의 말을 거부했던 김일성은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뚫으려다 허를 찔린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이 되고 우리는 반격에 나선 후 서울 탈환한다.
 
 
 
9월 28 서울 수복 
 
3개월간 북한의 점령하에 있었던 수도 서울을 1950년 9월 28일 탈환한다. 그 기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중공군의 개입
 
1950년 10월 19일 무려 약 30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투입이 결정된다. 악명 높은 중국의 인해 전술은 마치 사람의 파도와 같다 하여 인해 전술이다. 
 
스탈린에게 SOS 편지를 보냄

 

 
중공군이 개입한 이유
 
중국의 방파제 역할을 맡고 있던 북한이었다. 북한이 망하면 중국도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서였다.
순망치한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중공군보다 더 무서웠던 동장군
 
중공군이 개입한 것이 겨울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개마 고원은 체감온도 약 영하 40도였으나 한반도는 만주에 비해 덜 추웠기 때문에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유엔군에게는 중국군보다 더 두려웠던 동장군이었다. 추위와 동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유엔군이었다. 
 
중국군들은 낮에는 미군의 공습을 피해 낮에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숨어있다. 밤이 되면 피리 불고 꽹과리 치면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인 중국군은 너무 공포스러웠다. 
 
 
1.4후퇴 
 
중국군의 참전으로 밀려 내려온 국군과 유엔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결국 서울을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점령 당한다. 
 
 
 
 
숨은 영웅 지게부대
(=한국노무단)
 
우리나라의 70%가 산지여서 탄약,식량등 보급물자를 옮기기 힘든 험준한 지형이다. 탄약과 보급 물품을 지게에 지고 운송했던 사람들이 있다. 
 

현재 육군 기동군장이 약 20kg인데 당시 한국노무단의 물자무게는 약 45kg의 지게를 지고

산을 넘어 이동한 거리는 왕복 16km였다. 계급량도 군번도 없는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유모차 수송 작전

 

1950년 9월쯤 서울 거리에는 남겨진 고아들이 너무 많았다. 당시 미 공군 중령이었던 러셀 브레이즈델이었다. 

 

1.4후퇴 당시 부모 읽은 고아들을 피란시키던 중령

 

미군 트럭에 최대한 아이들을 싣고 피란 시켰으나 미처 피란 가지 못한 1000여 명의 고아들을 싣기 위해 제5공군 연대와 연락 제주도로 향하는 수송기를 확보했고 이 아이들을 무사히 제주도로 피신을 시킨다. 아이들을 수송하기 위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 재판에 선 러셀 중령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시발자동차
 
1955년 버려진 군용 차량의 부품을 활용해서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최초 자동차 생산의 시발점을 의미하는 한자어 '시발' 

 

 

자동차 자체는 버려진 군용차를 활용했지만 엔진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엔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동명이인 민간인 김영삼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시발점을 보여주는 평화의 상징 시발 자동차이다.
 
윌리스 MB자동차 
 

이승만 , 맥아더 장군이 애용 당시 이 차를 타고 전쟁을 진두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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