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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인천상륙작전과 포항여중 전투 속 학도의용군 in 용산 전쟁기념관(43)

by 짱신나^^ 2020.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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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3회]

 

오늘의 탐사지: 전쟁기념관

주제: 6.25 전쟁 속 인천상륙작전 및 포항여중전투 
출연자: 설민석, 성유리 

 

 

 

전쟁기념관 

 

6.25 전쟁 당시 북한과 병력 비교 
 
남한 병력10만 북한 병력 20만으로 북한의 병력이 거의 2배에 가까웠다. 남측에는 탱크는 아예 없었고 제일 충격은 전투기가 없었다. 
 

 

당시 우리 공군의 항공기는 L-4  연락기와 훈련기 뿐이었다. 전쟁 때  심지어 포탄을 손으로 투하하고 수중의 포탄을 다 던지면 할 수 있는 건 정찰 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하루 뒤 1950년 6월 26일 연습기와 연락기 만을 다뤘던 10명의 조종사가 급히 일본 후쿠오카로 출국해서 6월27일 ~7월1일 단 5일동안 전투 폭격기 속성 훈련 받은 후 7월2일 10대의 전투기와 복귀 후 다음날인 7월3일 즉시 전투배치된다. 첫 훈련부터 출격까지 고작 일주일이었고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기(F-51 무스탕)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기(F-51 무스탕)

 

왜 남.북간의 전력 차이가 ? 
 
북한은 정권 수립 직후부터 소련의 무기 지원과 군사 훈련을 받으며 무력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다.  남북 간의 전력 차이 2년 사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남하한 북한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 파죽지세로 서울을 뚫고 내려온 북한군은 20일 만에 대전까지 진입 결국 남한 정부는 33일만에 부산으로 수도를 이전하게 되고 마침내 국토의 90% 이상을 뺏긴 채 전쟁은 패전의 양상이 짙어갔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 구축
 
벼랑 끝에 선 UN군과 국군은 수도 서울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이때 북한의 모든 병력이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서쪽을 치고 나가는 것은 아군의 피해가 크니 무리한 돌파 대신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었다.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을 필두로 한 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수도 서울 탈환을 위해 인천으로 향하는데 6.25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은 작전이자 대한민국의 명운을 뒤바꾼 작전이 인천 상륙 작전이다. 
 
처음에 이 작전은 모두 반대했다. 당시 성공 확률이 약 1/5,000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한 이유는? 
 
첫 번째 이유는 기습 공격 당하기 쉬운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서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기 때문에 밀물 시간에 맞춰 7만5천여 명의 부대가 상륙해야 하는 상황인데 게다가 해협의  수로가 좁아 군함들이 일렬로 들어가야 하는 지형이라 기습 공격을 당하기 쉬운 지리적 요건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상륙 시기도 제한적이었다. 
 
수심이 깊어지는 밀물 때 상륙해야 하는데 자칫 교전으로 시간이 지체 되기라도 하면 썰물 때가 돼서 갯벌이 되는 서해안에 탱크가 진흙에 묻혀 진격이 불가 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세 번째 어둠의 밤 바다이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칠흙 같이 어두운 밤바다라 시야 확보를 위해서는 팔미도 등대를 미리 사수해야 했다. 선발대가 팔미도의 등대를 먼저 점령한 후 등대의 불빛을 비춰줘야 작전 수행이 가능한 작전이었다. 

 

수많은 위험 요소들로 대규모 병력을 잃을 수도 있었던 작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탁월한 신의 한 수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인천에 상륙 후 김포공항을 점령하니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수세에 몰려 전세는 대 역전 낙동강 전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위로 진격 후 빼았겼던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을 되찾기 위해 진격하는 국군

전세는 대역전

1950년 9.28일 3개월 만에 서울 수복을 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는다.

 

 

이 장면에 어떤 의미가? 

 

(박정모 소위의 태극기)

당시 전시 작전권은 유엔군에게 있었다. 점령하는 곳마다 미국 성조기를 꽂았다. 서울 탈환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그때 한 해병대 소위가 사고를 친다. 

 
당시 작전 계획상 중앙청은 유엔군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당시 을지로를 담당했었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박정모 소위는 되찾은 서울엔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태극기를 꽂기 위해 서울 수복 하루 전 1950년 9월27일 새벽 3시 이등병 및 훈련병 부하 3명과 박 소위까지 4명이 태극기를 품은 채 중앙청으로 향한다. 서울이 완전히 탈환되지 않은 상황에 북한군이 있었고 어두운 새벽 목숨을 걸고 중앙청 진입을 시도한다. 그렇게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10분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된다.  

 

 

완전히 서울 수복 이후 이 소식은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지고 해병대의 용기와 애국심을 높이 평가해 표창을 수여한다. 그러나 이것도 박정모 소위는 부하들에게 공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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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학생들이 3만 여명 된다. 대부분이 10대들 17세 미만이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10대들 이었지만 갑작스런 전쟁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든 학생들이었다.
 

 

 
포항여중 전투 
 
이들은 여러 지역에 활동을 했지만 포항여중은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 중 하나로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도 학생들이 지키고 있었다.
 
71명의 학생들이 포항여중에 주둔하며 11시간 반 동안 북한군과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전투였다.

포항여중 전투를 다룬 영화<포화속으로>

</포화속으로>

 

몇 차례 교전 후 학도 의용군의 존재를 눈치 챈 북한군은 학생들에게 회유를 시도 북한군은 항복할 것을 종용 하지만 단 한 명의 학생도 항복하지 않고 교전을 시작한다. 
 
한창 교전 중 바닥난 실탄  
 
그때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을 다시 주워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것을 다시 던져가며 말도 안되는 열악한 악 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운 학생들이었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며 육박전으로 북한군 5~60명을 사살했지만 학생들은 거의 전멸했다. 
 
포항여중 전투의 의미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지키면서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을 이끄는 초석이 된 전투였다. 이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병력이 부족한 국군에게 큰 힘이 되었던 학도의용군이었다.
 
수많은 희생과 비극이 담긴 약 3년간의 전쟁끝에 1953년 정전 협정을 맺게 된다. 
 

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전사자 명비

벽을 가든 메운 호국영령들의 이름

 

6.25 전쟁의 숨은 영웅

  아침해 레클리스  

 

경주마 '아침해'라는 말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아침해'는 무기와 탄약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보급 기지와 최전방을 수백 차례 오가며 포탄을 싣고 부상자를 옮겼고 자신도 눈과 다리에 총상을 입어 가면서까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냈다. 

 

이런 '아침해'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해서 군인들은 아침해에게 레클리스(Reckless)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 군마는 1997년 링컨 대통령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세계 100대 영웅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쟁 평화를 위한 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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