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0회 후반]
오늘의 탐사지: 창의문-남한산성
주제: 인조반정, 정묘호란
출연자: 김강훈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유
조선시대는 적장자(=정실부인의 첫째 아들을 의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선조에게 자신의 방계 출신 신분은 콤플렉스였다. 그래서 선조는 다음 왕위는 무조건 적장자에게 주려고 했으나 중전이 아이가 없었다. 후궁 공빈 김씨만 두 아들을 출산해 첫째가 임해군 둘째가 광해군이었다. 후궁의 자식만 두명이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주기 싫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명나라로 피신 갈 계획을 세우고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 책봉 한후 18세 광해군에게 나라를 맡기고 선조는 명나라 행을 택했다. 그렇게 선조 대신 나라를 지킨 광해군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시 선조 나이 51세에 19세 부인과 결혼한다. 아들 광해보다 9살 어린 새 엄마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였다.
그때부터 광해군은 살얼음판을 걷게 된다.만약 새엄마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게 되면 적장자가 되는데 세자의 자리에 위태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때마침 명나라에서 광해군는 적장자가 아니라서 세자로 인정 하지 않겠다고 한다. 당시 세자 책봉시에 명나라의 승인도 필요했다.
선조는 명나라를 핑계로 세자 자리를 다시 뺏으려 했다. 명나라에서도 아버지 선조에게서도 인정 받지 못했던 광해군은 살얼음판으로 16년동안 세자 시절을 보낸다. 그 와중에 광해군의 새엄마 인목왕후가 아이를 가진다.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영창 대군이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마자 불안에 떨던 광해군은 그때부터 성격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조가 승하하게 되고 권력을 잡은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들 영창 대군이 아니라 광해를 왕으로 지목한다. 당시 영창 대군은 3살이었다.
광해가 왕이 된 이후 뒤바뀐 서열로 이번에는 인목대비가 살얼음판을 걷게 된다.
어렵게 얻은 왕위에 심한 집착을 가졌던 광해군은 특히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면 광해가 직접 나서서 죄인을 추국했는데 죄가 없을 경우 앞으로 고변을 하지 않을까 우려해 계속 고변을 할 수 있도록 고변한 사람에게 무고죄를 묻지 않았다.그 이후 서로 서로 역적이라고 모함을 하며 피바람이 분다. 무럭무럭 자라서 8살이 된 영창대군은 왕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장자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제거한다. 영창 대군을 추대,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린다. 김제남의 아들과 사위들 영창대군의 남자 외삼촌들도 죽인다. 그 후 영창 대군은 8세 때 역모죄로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다.
집에 가둔 채 곡식을 끊어버리고 방에 불을 지펴 증살시켜 죽였다. 아들의 죽음을 그냥 넘어 갈리 없는 인목대비를 (예전에는) 경운궁이라 불렀던 덕수궁에 인목대비를 유폐시킨다.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광해군에게 온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폐모 살제
폐모: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살제: 형제를 죽였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인조반정
그 충격으로 정원군 또한 사망한다. 정원군의 또다른 아들인 능양군(훗날 인조)은 본디 유약했으나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충격에 180도 변하게 된다.
인조반정 뒤
공신들의 명단을 써 놓은 창의문 문루
7명의 일등 공신들 김유, 이귀, 신경진,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재
이괄의 난
총 3번 몽진을 간 인조
- 1624년 이괄의 난때 공주로
- 1627년 정묘호란때는 강화도로
- 1636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정묘호란 (1627년)
피는 신하들이 대신 나가서 마시는 걸로 합의를 본 것이 정묘호란의 마무리다. 이렇게 정묘호란은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후금으로 돌아가면서 조선 백성들을 약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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