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3회 후반]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기 6개월 전인 1949년 3월 5일에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러 간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남침 의사를 밝히게 되고 전쟁 시 소련에게 군사지원 요청을 한다. 이에 소련은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수차례 반대한다.
그러나 1950년 3월에 김일성을 다시 스탈린을 찾아가서 미국은 남한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단 3일이면 전쟁을 끝낼수 있다고 주장하며 승전을 확신했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남침 지원을 재차 요청한다. 결국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스탈린은 동의하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침한다.
소련입장이 1년 전과 달라진 이유는 1949년 8월 소련의 핵 개발이 6.25 전쟁에 영향을 미친것이다.
1950년 5월 14일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북한의 전쟁 계획에 대한 협조를 요구하는 암호전문을 보낸다.
현 국제상황이 변하였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 문제는 중국 동지와 북한 동지간에 사전 합의되어야 하며 서로 이견을 보일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이뤄질 때까지 미루어야 함.
-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는 비밀문서 내용
이 내용은 중국이 동참을 하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소련의 입장이 담겨있다.
김일성은 자력으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여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중국으로부터 군력을 지원받아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무기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20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한다. 반면 국군은 탱크 미보유, 북한 전투기는 211대 , 국군은 0대로 그래서 정말 김일성이 장담한 대로 군사력의 차이로 3일 만에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다.
6.25 전쟁이 핵전쟁이 될 뻔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수세에 몰린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 미국이 꺼낸 비장의 카드는 핵무기 사용이었다. 6.25 전쟁 중에 핵 무기 사용을 검토한 것만 4차례에 이른다.
첫 번째 핵무기 사용 검토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시상황을 유엔군은 역전시킨다. 9월 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며 6.25 전쟁 승리가 가까울 무렵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면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리게 된 미국은 이때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게 된다. 여기서 맥아더와 트루먼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위협을 느낀 맥아더 장군은 전쟁을 끝내려 트루먼에게 핵 사용권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핵 사용 권한은 대통령 자신의 고유 권한으로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과 유엔사에 대적하는 추가 병력 투입 가능성으로 인해 유엔군의 원자탄 사용 가능성이 있음.
The apparent overt invention of Chinese Communist forces in the Korean conflict and their capability further to augment the forces opposing Commander in Chief, United Nations Command (CINCUNC), raises anew the question of possible use by UN forces of the atomic bomb.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관련 유엔군의 급작스럽게 원자탄 사용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으로 사료됨.
The use of atomic bombs against troop and materiel concentrations might be the decisive factor in enabling the UN forces to hold a de-fensive position.
긴박했던 상황 속 미국의 핵 사용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두 번째 핵사용 검토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 한다.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 기자: 그 모든 행동에는 원자폭탄도 포함됩니까?
- 트루먼: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
- 기자: 그 말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고려한다는 말입니까?
- 트루먼 : 우리는 항상 원자탄 사용을 고려해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용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한 시점에 어떠한 무기의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핵무기 사용 검토
트루먼의 공식 발표 후에 맥아더와 트루먼의 2차 갈등이 시작된다. 트루먼은 원래 38선 일대에서 정전협정을 하자고 제안하고 맥아더는 전쟁의 승기를 잡고 싶은 마음에 1950년 12월 1일 26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해서 소련, 중국에 핵 공격을 할 26개의 지역을 꼽아 10일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하며 이 같은 제안을 했다.
이에 맥아더는 유약한 트루먼 대통령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대놓고 발언을 한다. 이 상황에서 1951년 4~5월 유엔군과 중국군의 일진일퇴의 공방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괌으로 마크-4 핵탄두가 도착한다. 괌에 핵탄두를 전지 배치시키며 트루먼의 승인만 나면 한반도에 핵폭탄이 떨어질 일촉즉발 위기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킨다.
그리고 맥아더의 뒤를 이어 리지웨이 장군으로 교체된다.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난 후 트루먼은 자신의 힘을 보여줄 기회를 찾아 다시 한번 핵무기 사용을 재검토하게 된다. 또한 맥아더 장군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도 핵무기 사용을 계속 주장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 북한 지역에 대해서 실전과 다름없는 핵폭탄 투하 훈련을 4차례나 감행했던 기록이 있다. 이를 '허드슨 항구 작전'이라 명명했고 원자 폭탄이 아닌 재래식 폭탄이었지만 비행기가 출격하여 떨어뜨리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원자폭탄 투하와 똑같이 실행 과거 히로시마에서 했던 핵 사용 데이터를 모아서 수차례 모의 핵 투하 훈련을 진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발견된 핵을 떨어트릴 지역이 표시된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38선 이북의 평강으로 전선의 중앙에 위치, 대도시를 피해 38선 근처를 선택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만약 한 번도 에 떨어뜨릴 핵폭탄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위력의 3배 정도 되는 위력이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 한반도에서는 더 많은 영토 확보를 위한 고지전이 진행이 되어 있었다.
4번째 핵무기 사용 검토
이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이었고 트루먼의 후임으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제16대 미 육군 참모총장 출신)가 당선된다.
아이젠하워는 6.25 전쟁이 계속 이어질 경우 1954년 5월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날짜까지 정해놓았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이유는 6.25 전쟁의 배후 조종자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소련과 중국에 혼란이 찾아왔고 스탈린 사망 4개월 만에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발표되었는데 북한과 만주 지역까지 포괄했을 때 핵무기를 사용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초토화되어 있었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던 상황이라 엄청난 위력에 상응하는 피해가 없을 것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핵무기가 전쟁 상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면 소련 측에 핵무기의 위압감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고 또한 3차 세계대전도 우려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보다 승리를 위한 전략이 우선 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 빚어낸 비극적 상황이었다.
6.25 전쟁사를 연구하다 보면 인천 상륙작전 이후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는 전쟁의 주체가 남북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중국 수뇌부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한반도의 문제를 다른 나라가 결정하도록 만든 이런 감당하지 못할 무책임한 행동을 했던 김일성이 지탄받는 이유이다.
☞인천상륙작전과 포항여중 전투 속 학도의용군 in 용산 전쟁기념관(43)
☞공동경비구역 JSA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0회,11회]
☞(얄타회담,애치슨 라인) 6.25 전쟁 원인,전개 과정/38선 생긴 이유,원인 (=남북 분단 이유)
☞서울 속 6.25 전쟁 흔적들/한강다리 폭파의 진실/단장의 미아리고개 의미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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