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역사에서 학생이 주축을 이루는 3.1 운동, 6.10 만세 운동, 부마 민주항쟁,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항쟁이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민주 항쟁에는 학생 운동이 빠질 수 없다. 실제도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1980년대 5월 초 신군부의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고 결국 서울역 앞에 35개의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다.
1979년 상황 파악하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10.26 사태)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 이때의 분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체재가 무너졌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디어 민정이양이 되어 민주화가 될 거라 믿고 있었다. 그 후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 대통령 또한 민정이양을 당연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10.26 사태를 일으킨 김재규가 그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체포가 되면서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은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전두환의 계획
전두환은 점점 권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실권 장악을 위한 두 가지 계획을 세운다.
▷첫 번째는 특정한 상황에 군을 투입한다. 학생이나 대중 시위가 격화되었을 때 군을 투입해 진압하는 이름하여 '충전 작전'으로 민주화운동을 초기에 무력으로 진압하자는 계획이었다.
▷두 번째는 'k-공작' 계획으로 언론을 통제하는 것이다. 검열과 탄압을 통해 여론을 차단하므로 시민들이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K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설
- KOREA,
- 민주화를 지지했던 삼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kill 한다
- 전두환을 king으로 만드는 k
수많은 설이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신군부의 주장은 대학생들의 시위는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아닌 사회적 혼란을 조장한다고 비판하고 3김의 야권 지도자들이 민주화보다는 정치싸움에 주력한다는 언론을 통제하며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명분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와 자진 해산
5.18 민주화운동이 있기 전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서울역 앞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추진되면서 계엄해제, 유신철페,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서울역에 집결했던 학생의 수는 10만여 명에 이르렀고 이 시기를 '서울의 봄 , 민주화의 봄'이라 부른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위 해산을 결정한다. 군대가 투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유혈 사태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서울과 경인지역을 학생들이 해산을 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선포 (5월 17일)
그러나 학생들의 해산과는 달리 신군부의 이면에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1980년 5월까지 계속된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는 상황이 되자 정치권에서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낸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정권 장악의 다급함을 느끼고 5월 17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비상 국무회의를 통해 (무장한 장교들과 장갑차가 배치된 상황) 군대를 투입을 결정하고 8분여 만에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한다.
신군부의 5.17 쿠데타
전국 31개국의 군대를 투입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과 자유를 탄압받게 되던 학생들이 충돌한다. 5월 16일 광주에는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수많은 광주 학생들이 계속적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학생들은 만약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달 오전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을 했다. 전 군대가 들어오게 되고 5.18일 새벽 비상계엄령 선포 아래 대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 공포의 일요일을 맞은 광주였다.
7 공수여단 투입(5월 18일 오전 10시경)
등교하던 학생들은 군대가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군대는 학생을 강제 해산을 시키는 과정에 학생들을 추격 곤봉으로 때리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을 향한 계험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일어난다. 단지 일요일에 도서관에서 너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진행된 것이다.. 투입된 7 공수단은 요인 암살과 게릴라전에 특화된 공수부대였다.
이렇게 학교로 들어가지 못하고 강제 해산된 300여 명의 학생들은 광주역을 거쳐 금남로 향한다. 금남로가 사람이 많고 일반시민도 많은 곳이였다. 이때부터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쓰기 시작하며 광주의 금남로 일대가 5.18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첫 번째 사망자 발생(5월 18일 오후)
철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은 M16을 등에 메고 대검을 허리춤에 찼으며 야구방망이만 한 진압봉을 들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학생들을 제압해 나갔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사망한다.
4명의 공수부대원이 일제히 타격을 가해 온몸이 부셔져 19일 날 새벽 3시에 사망한다.
11 공수여단 첫 발포 (5월 19일)
7 공수여단만으로 역부족이라 생각했던 신군부는 11 공수여단을 계엄군의 수를 더 늘려 강경진압은 더 심해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이 유탄에 맞고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5차례 수술했으나 사망한다.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 5월 20일
31사단이 계엄군이 들어온다. 약 3400명의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온다. 전쟁터를 방 불쾌한 광주 상황이었다. 관망하던 시민들이 무자비한 폭력진압에 희생되던 학생들을 보며 분노가 폭발하고 시위에 합세하면서 시민들의 저항이 본격화되면서 수십만 명의 광주시민이 집결하게 된다. 버스 10여 대와 택시 200여 대의 차량시위가 이어진다. 버스기사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가지고 시위를 한 것이다.
최초의 집단 발포(5월21일 오후 1시)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가 일어났고 사망자가 5명 부상자가 11명이 발생되었다. 1시경에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11 공수의 집단발포가 시작되었다. 사격은 약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옛 전남도청 건물은 시민군이 쓰려져 간 5.18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항쟁지로 사용했던 곳으로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광주시민들은 방송시설과 장비가 있는 전남도청을 본부 삼아 사용했었다.
그 당시 광주시민들의 무장을 했던 이유는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 정이었고 18일 아침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뽑고 돌격 앞으로를 강행하였기에 이에 학생들은 정부의 불법 탄압을 규탄하기 위한 것이었다.
5.18 민주화 운동 목격자 증언
5.18은 폭동이다?
5.18 당시 외신과 소통을 위해 통역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통역만 했는데 데모 주동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의 난동, 북한의 간첩 소행 등으로 왜곡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그 당시 신군부에서 유언비어라고 했던 말들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파출소 경찰서를 약탈을 했다?
파출소장이 직접 키를 줬어요, 무기를 가져가라고 일부 지역 (전남 화순)에는 경찰이 무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총을 든 공수부대와 맞서기 위해서 무기를 들수 밖에 없던 상황에서도 질서를 지킨 시민군들이었다.
당시 의사의 증언은 대부분 3일 동안 잠을 못자고 수술을 계속해서 수술 기록 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수술 중 발견된 M16 총알을 모아놨다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에 기증했다.
전남 빌딩 헬기 사격 증언을 위해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석했던 인요한 교수가 말하길 도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건물이 벌집처럼 엉망이었다고 증언한다. 소총탄은 말할 것도 없고 큰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마지막 투쟁 (5월 27일 새벽)
당시 계엄군에 대한 대책회의가 이루어졌는데 나이 든 시민들과 학생들이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계엄군과 협상 불가 의견이었고 시민들은 협상을 하자는 의견이었다. 피해를 당했음에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은 노력을 했고 나중에 항쟁파만 남는 상황에서 수습대책위 원해는 최소의 인원만 남기고 무기를 자진 반납하며 무장해제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더 많은 군사 병력을 광주에 투입하기 시작한다. 결국 수습대책위원회는 최후의 인원을 남긴다. 결국 공수부대는 새벽에 급습하는데 공수부대 옷을 벗고 자신들끼리의 표식을 하고 육군 보병인 척 새벽 4시에 진입하여 시민군에게 무차별 총격을 하기 시작하고 공수부대는 시민군을 1시간 30분 만에 진압했다. 신군부는 이날 전차, 장갑차 등 각종 살상 무기를 총동원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맞서던 광주 시민들의 항쟁은 열흘 째 되던 날 막을 내렸다. 죽지않고 잡힌 사람들은 모진 취조와 고문에 교도소까지 다녀오며 보복은 가혹했다.
5.18 민주화 항쟁은 비극적으로 끝났으나 그것은 역사를 바꾼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광주 항쟁파가 죽음으로 버티었기 때문에 이것이 민주화 항쟁으로 남게 된 것이다.
5.18 민주묘지가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군부에게 참혹하게 진압을 당했지만 그 이후에도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들이 계속했던 결과이다.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변화와 의의
5.18 민주화 운동 이후 결국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은 제 11대 대통령으로 권력을 잡게 된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의 실체가 담긴 영상이 대학가에 퍼지고 진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 대학생들은 대학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민주 항쟁을 시작하게 된다.
1987년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이 민주화 열기에 도화선으로 작용하여 결국 6.10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민주주의 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8년 국회법이 개정이 되면서 5공 청문회 등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를 국회가 조사할 수 있도록 만든 법률로 그 결과로 현재 우리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국정감사, 청문회 등의 생중계는 물론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도 시청하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의 떨어진 사건이 아닌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서 시작된 수많은 역사의 변화 속에서 만들어진 제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은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 대한 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출처 선녀들 마스터 4회]
광주 전일 빌딩 245 (1980년 5.18 헬기 사격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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