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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사태 이야기

by 365 ^^ 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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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7회 전반]


오늘의 탐사지: 국무총리 공관

주제: 12.12 사태 
출연자: 설민석 




대한민국 격동의 1979년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10.26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해야 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해 10.26 사태 수사를 맡긴다. 그런데 이 수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권력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첫번째는 차지철 경호실장
두번째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세번째가 전두환 하나회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 당시 별 2개였고 그때 전두환 또한 투스타였다. 





1979년 12월 6일날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되지만 피살 사건 이후 실세는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 사령관 정승화였다.


당시 계엄법에 따라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 그는 누구인가?


전두환은 육사 11기로 육사 11기 이전에는 6.25 전쟁으로 인해 단기 교육으로 임관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정식으로 4년제 정규 육군 사관학교를 들어오는 첫 졸업생이 11기다. 






'하나회'란?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군부였다. 본인이 군사 반란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다른 군사반란으로 누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라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긴급하게 자신에게 알릴수 있고 효과적으로 군부를 장악하기 위한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결성된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사조직이 바로 하나회였다. 


'국가와 태양은 하나다'의 의미로 하나회의 태양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그들은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그들은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군대 내 요직들을 차지하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이 있다. 


하나회 회원 가입 조건

 #정규 육사 출신 
 다수가 영남 지역 출신 (학연&지연)
 가입 시 절대 충성을 맹세 
 고위층에게는 활동비를 재벌에게는 자금을 징수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가 있다. 

그들만의 사조직이였기에 드러나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1973년에 관련 수사 도중 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나회 서약 조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상호 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이 서약을 어길 시 인격 말살 감수 
군인들임에도 불구 부르는 호칭도 계급 상관 없이 형님 


이 하나회 회장이 전두환이였다. 





박정희 피살 사건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주도하에 군제가 다시 재편되기 시작하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요직에 앉히며 육사 11기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때 전두환의 생각은?  

하나회 배후는 대통령이었는데 대통령이 없어지니 전두환은 생존에 두려움을 느낀다. 10.26 사태 조사를 하던 중  현장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보고 받게 되고 수사를 빌미로 직속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참고인으로 부른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것이었으나 참고인 조사 후 정승화는 심기가 불편했고 국방부 장관 노재현과 만나 전두환 전출을 의논했으나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판단 일단 보류한 상태였다. 



그런데 전두환의 전출설이 소문나기 시작하자 전두환은 '내란방조죄'라는 혐의를 씌워 정승화를 체포하려고 한다.


그러나 계급이 투스타 전두환은 별4개의 정승화를 체포할수 없었기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기로 한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고



이렇게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두환의 거사일 12월 12일이었고 아주 극비리에 진행된다. 12월 12일 저녁 6시30분에 하나회 핵심 맴버들을 소집(노태우, 박희도 등)하고 장소는 장세동이 대대장으로 있는 경복궁 수도경비 사령부 제30경비단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받기 위해  바로 이곳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출발하고 보안사 요원들은 헌병대 버스를 이끌고 정승화를 연행하기 위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 동시에 각기 다른 세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기존 군부 세력이 반격할 수도 있으니 계획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 군부 세력의 핵심 인물들인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특전사 사령관 정병주,김진기 등을 연희동 비밀 요정으로 초대해 만찬을 즐기게 했다. 

정승화 연행 재가 요청 

전두환은 군부 세력들을 연희동 만찬에 초대했지만 정착 본인은 참여하지 않았고 12월 12일 저녁 7시 삼청동 총리 공관에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러 전두환이 찾아와 정승화가 대통령 피살과 관련이 있으나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청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것은 군의 문제이므로 국방무 장관과 상의하려고 했으나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고 재가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밖으로 나와 하나회에 연락한 전두환은 계획을 보류하려 했다. 

정승화 납치 연행

그런데 정승화를 이미 체포해서 보안사로 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상황이 벌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 도착한 보안사 요원들은 정승화에게 김재규와 돈을 거래한 정황에 대해 추궁을 했고 이에 화를 내며 정승화가 아니라고 하는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공관의 경비병과 신군부 세력 간에 갑작스러운 총격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보안사 요원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려는 순간  정승화는 '사격중지' 라고 외친다. 

자신을 향한 전두환의 반란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신군부 세력들은 무력을 행사하며 강제로 정승화를 납치 연행한다. 



거사일을 하필 12월 12일로 정한 이유

 


다음날 12월 13일이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새로운 내각의 구성을 논의하기 위한 날이였기에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전두환이 정승화를 연행해 조사 후에 그 결과가 군의 인사에 반영이 된다면 10.26 사태의 수사는 그대로 종결이 되고 이 사건과 연루된 육군참모총장도 자연스럽게 교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군의 신뢰와 단결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군권 장악이 신 군부 세력의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신군부의 서울 진입

한편 경복궁 안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9사단장 노태우가 남아있었다. 노태우는 하나회 소속 공수여단장들에게 자기 부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고 9사단은 서울로 진입하도록 명령한다.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는 9사단 및 1,3,5 공수여단, 2기갑여단이 서울을 장악하기 위해 서울로 진입하고 있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검문소에는 모두 전화해서 군부대 이동이 대통령의 지시라고 허위 보고를 하고 모두 통과를 한다. 



신군부 세력  VS 군부 세력

연희동에 있던 군부세력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납치 사실을 알게 되고 연희동에 있던 정병주 특전 사령관, 장태완 수도 사령관등은 사태 수습을 위해 각자의 부대로 복귀한다. 이렇게 군부와 신군부의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미 하나회 세력이 일부 군부대를 장악했고 정병주 특전 사령관은 부대에 복귀 하자마자 피습을 당한다.  




군부 세력 9공수여단 출동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은 부대 복귀 하자마자 하나회 세력이 장악한 경복궁 안 30경비단에서 장태완을 회유하기 위해 연락하나 회유에 굽히지 않았고 동분서주하며 군사 반란을 막아보려 했다. 


장태완 소장은 수도경비 사령관(수경사) 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등은 그를 따르지 않았기에 군부 세력 9공수여단을 서울로 출동시킨다. 서울 한복판에서 전쟁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이 장악한 군부대는 예상보다 많았고 결국 9공수여단은 출동 15분 만에 회군 명령을 받는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군대의 일부 1공수 여단을 출동시켜 국방부, 육군본부의 장악을 시도한다. 



신군부의 
육군본부, 국방부 장악

육군본부, 국방부에서의 총격전 끝에 신군부는 장악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한 가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였다. 

10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이 납치될 당시 육군참모총장 공관 옆 국방부 장관 공관인데 총소리를 듣고 피신했던 것이다.  그는 육군본부->한미연합사->국방부로 자리를 옮겨가며 피신하고 있었다. 

이후에 노재현 장관은 국방부에서 신군부 세력과 맞닥드리게 되고 국방부 지하에 숨어있던 노재현 장관을 신군부 세력이 잡아내고 결국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은 성공하게 되면서 장태완 소장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연행 재가 서명 성공 


국방부 장관이 나타나자 더 이상 재가를 미룰 수 없었던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재가를 위해 서명을 한다. 길었던 1979년 12월12일의 밤이 지나고 12월 13일 세상이 뒤바뀌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는 가고 신군부의 새 아침이 밝았고 그렇게 제 5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의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 재가 서명이 훗날 신군부 세력의 운명을 바꿔놓게 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연행 재가 서명란에 
이렇게 기록했다. 



'대통령 최규하 
새벽 5시'




시간을 적음으로써 재기 이전에 정승화 총장이 연행된 것을 명시한 셈이었다. 이 서명으로 인해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재가임이 적용되어 

김영삼 대통령 때 12.12 군사반란은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 으로 규정됐고


신군부 세력 구속 


반란 수괴와 내란 등의 혐의로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되고


정호영, 장세동등 신군부 핵심 세력들 역시 구속되고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1심에서 각각 사형 징역 20년이 선고했지만 최종적으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형이 확정된다. 


특별사면 
김영삼 대통령 때 구속됐던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15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이후 화해,용서,타협의 시대를 열자는 구호아래 화합의 의미로 약 2년 만에 특별 사면을 받아 출감한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많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희생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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