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6회 중]
주제: 10.26 사태
출연자: 설민석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1979: 3,4 공화국)
그렇게 제3공화국 출범한다.
10월 유신
(10.17 특별선언)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박정희) 대통령의 정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징후는 여러 군데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겐 생활의 균형을 잡게 해준 건 육 여사였다. 그분이 세상을 뜨자 대통령은 생각과 행동의 균형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김종필 증언록 중 ]
문제는 차지절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유신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 둘사이에는 엄청난 계급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점점 더 선을 넘는 행동들로 권력 내부 갈등이 고조된다. 무소불위 권력을 차지철이 2인자로서 누리는 동안 유신정권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에겐 모든 것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과 척을 지게 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로 인권을 강조했던 대통령이었다.
1979년 한미정상회담으로 내한한 지미 카터는 국회의사당에서 연설을 하는데 회담중 인권, 민주주의를 계속 언급했고 야당 신민당 이 말에 환호하기 시작하니 슬슬 대통령의 심기는 불편해졌고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를 계속 지적한 카터 대통령에게
카터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반박을 했다. 이로 인해 완전히 얼어붙은 한.미 관계였다.
석유파동
두번째 문제는 경제가 어려워진다. 석유파동으로 인해 원유 가격 급상승으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에 큰 타격으로 다가왔고 업친데 덮친 격으로 그때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으로 넘어온 시기였다. 조선, 제철 등의 중공업에 투자, 육성이 이뤄졌다.
그러나 석유파동으로 대량의 원유가 필요했던 대한민국에 직격탄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성장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는데 경제가 어려워지자 지지율이 떨어지고 경제 성장이라는 힘을 잃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YH무역사건
가발 제조 회사였던 YH무역회사는 수출 13위 기업까지 올라간 큰 회사였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자 폐업하기 되고 당시 일하던 직공들은 상대적으로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폐업과 동시에 길거리에 주저앉게 생긴 여성 노동자들은 결국 단체로 시위에 돌입하고 시위를 했던 장소는 야당 신민당 당사였다.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긴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 1000여 명을 투입하게 된다.
그때 여성 노동자들을 향한 무차별 폭행 및 연행이 자행되고 21살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도망치다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발표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YH무역사건이었다.
#부마 민주항쟁
YH무역사건의 당시 배경이 된 신민당의 총재 김영삼은 기자회견을 통해 강력히 정부를 규탄하고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발언한다. 이런 김영삼의 인터뷰가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하게 되고 하루아침에 김영삼 야당 총재는 제명이 된다.
김영삼의 지지 기반이었던 부산, 마산 지역으로 이곳엔 많은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었는데 석유파동으로 다른 곳보다 경제 침체가 극심했던 경남지역은 먹고 살기도 힘든데 김영삼까지 제명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부산대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학생 시위가 시작된다. 이것이 부산,마산 합쳐서 부마민주항쟁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보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인 그가 직접 부산으로 내려온다. 부산 마산항쟁을 보다 김재규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김재규는 심각성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한다.
민심 이반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 저항으로 굉장한 심각성을 어필하고 전국적인 시위가 전개될 거라 판단한 김재규는 미봉책이 아닌 근본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차지철에 의해 판단력을 상실했고 차지철에 의해 그의 의견은 완전히 묵살된다. 결국 김재규는 그때 박정희로 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전날1979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주요 인물들을 한 자리에 소집한 후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다.
이때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더욱 실망하게 되고 그렇게 10월 25일이 지나 운명의 그날 10월 26일이 된다.
운명의 10월26일박정희 암살 당일
충남 당진 삼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여할 예정이었고 다음 일정이 당진 kbs 송신소 준공식에 참여하는 일정이었다. 당시엔 방송국 및 기업 등이 중앙정보부의 관리를 받던 시절로 당연히 중정부장이 참석해야 되는 자리인데 차지철이 동행한 것이다.
오전 일정이 끝난 후 다시 김재슈에게 연락한 차지철은 오늘 6시에 궁정동에서 각하와의 술자리 참석하라고 전한다. 그래고 갑자기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한테 전화를 하는 김재규는 궁정동에서 술자리를 하자는 이중으로 약속을 잡는다.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후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윤군의 수장인 정승화와 약속을 잡은 것이다. 육군참모총장을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였기에 이들은 친분이 두터웠다.
이들이 이야기 중 가수 심수봉, 모델 신재순이 만찬 초대로 들어오고 분위기는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을 계속 옹호하고 김재규에게 거슬리는 언행을 계속하는 차지철 때문에 결국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2층으로 가서 준비해 놓은 권총을 챙겨 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의 직속 후배들을 부른 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김재규는 각하에게 이런말을 한다.
그러고 나서 옆에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하는 말
형이 각하를 제대로 못 모시니까 각하가 저러고 계시는거 아냐? !!
김재규의 돌발행동에 다들 당황하고 그때 품에서 총을 꺼내서 차지철을 쏜다.
그리고 바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저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팔에 총을 맞은 차지철을 다시 쏘려고 하는데 탄피가 걸려서 불발이 되자 권총을 바꿔들고 다시 현장으로 왔는데 차지철이 보이지 않는다.
문갑뒤에 숨어있는 차지철을 총으로 쏴 죽이고 쓰러져 피를 흘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한다.
사건 발생 후 김재규가 잡히고 현장 검증을 하는데
이날의 목격자 심수봉
사건 당시 불렀던 노래가 <그때 그 사람>이었는데 대학 가요제에서 빅히트를 치고 전국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심수봉이고 박정희도 심수봉 노래를 굉장히 좋아해 초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의 목격자로 계엄사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정신병원에 1달 동안 감금당하기도 했고 몇 년간 방송출연 금지까지 당한다.
육군 참모 총장 정승화의 선택은?
김재규는 궁정동 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의 차를 타고 중앙정보부로 가려고 하는데 각하가 돌아갔다는 얘기를 하고 정승화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 본부로 차를 돌리는 운명의 유턴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육군 본부 지하 벙커로 가서 국무위원을 전부 소집하고 목격자 중 한명인 김계원 비서실장도 참석한다.
거기서 김계원 비서실장을 통해 김재규가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리고 보안사에 넘기라고 명령한다. 보안사 사령관은 전두환이었다.
현직 대통령이 피살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고 전두환은 대통령 피살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그리고 현 정권 지휘부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전두환에게 권력이 이동한다.
이렇게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박정희 대통령은 최후를 맞이 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시작으로 18년간 집권을 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며 18년간의 정권은 이렇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져버렸다. 참고로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던 날이기도 하다.
▼관련 내용
☞[6월 민주항쟁] 민주인권기념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