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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중동 석유파동 이슬람 혁명 영향 (걸프전쟁 전 미국 중동문제 개입과정)

by 365 ^^ 2021. 8. 20.

[E.24-1 서강대 이슬람학 교수 박현도] 

 

1908년는 중동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바로 이 해에 이란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석유가 발견된다.  지상 15M로 솟은 검은 석유 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중동과 전 세계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석탄에서 석유로 동력원을 바꾸면서 석유는 무엇보다 중요한 물자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삶에 필수 요소가 된 석유였다. 문제는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석유지만 중동은 석유를 탐사하고 채굴하는 기술이 미흡했다. 마스제드 솔레이만의 석유도 영국에서 탐사하고 채굴한 것이었다.  

 

 

레드 라인 협정

중동의 석유로 향한 세계의 관심으로 인해 서서히 싸움판이 만들어진다. 미국이 중동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1928년 레드라인 협정에 미국이 참가하면서부터이다. (제1 차 세계대전에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중동 석유의 주도권을 가진 협정.) 

 

1908년 이란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석유가 발견

1927년 이라크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발견 

1930년 이후 페르시아만 지역에 석유나오면서  

 

 

중동에 먼저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자리를 잘 잡고 있었고 후발 주자였던 미국이 참여하면서 레드라인 협정이 미국의 중동 석유와 관련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미국은 처음에 중동의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는 1859년에 펜실베니아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미국은 이미 산유국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부터 미국은 중동 석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더 이상 새로운 유전 발견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페르시아만(걸프)의 석유는 인류 최고의 상품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미 중동의 석유는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은 어떻게 석유 전쟁의 승자가 되었을까? 

 

1944년 주미 영국 대사가 미국 대통령 접견을 신청한다. 그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다.

 

이란의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중동의 정세를 영국과 정리한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만을 가진 영국이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비밀 협약

1945년 2월 14일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가 미국 군함에서 비밀회담을 갖는다.  영국은 이 회담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만남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논의한 얄타 회담 직후의 만남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으로 가는 길에 사우디 대통령을 만난것이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걷는 것이 어려워 휠체어를 타고 다녔고 사우디 국왕 또한 다리를 다쳐 걷기가 힘든 상태여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휠체어도 선물하며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석유 개발에 대한 특권을 가지게 된다.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와 사우디는 미국의 석유를 공유하게 된다. 회담이 끝난 뒤에도 아랍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한 루스벨트 대통령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회담이 끝난 뒤 2달 만에 사망한다. 만약 루스벨트가 살아있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동 입지를 다진 미국

사우디아라비의 석유는 압도적으로 많다. 우리나라의 하루 석유 사용량은 보통 270 만! 290 만 배럴인데 장충체육관을 꽉 채운 양이다. 사우디가 하루에 뽑아낼수 있는 양은 천만 배럴 이상이라 볼 수 있다.

 

국가별 원유 매장량

그리고 또 사우디가 중요한 이유는 이슬람 교회의 중요한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랍 세계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도 무시할수 없었다.  미국은 중동에서 입지가 다져지고 영국은 슬슬 뒤로 밀리기 시작한다.  

 

 

산유국들의 OPEC 결성

 

그러나 산유국들도 석유를 가지고 무엇가를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1960년에 9월 14일 이란,이라크, 쿠에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수엘라 5개국은 석유 매장량이 많은 나라들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모임을 가진다.  지금까지 석유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미국과 영국계 미국 회사들이 결정했다. 그래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5개 국가가 나서서 1960년 9월14일 opec (석유수출기구)이라는 조직을 만든다. 당시 이 5개 국가가 생산하는 석유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의 86%  차지했다. 정확히 86.6% 였다. 

 

 

석유파동의 원인 

기존의 중동 질서를 완전히 깨버리는 또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건국이다. 그리고 독립 선언을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을 하고 그 다음날 바로 아랍국가들이 전쟁을 시작하고 중동은 거의 3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간다. 이스라엘 건국은 1973년대까지 30년 동안 4번이나 반복하는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그동안 세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 4차 중동전쟁때 이집트(아랍군)가 일격을 가한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키푸르라는 유대교 속죄일이었기에  기푸르 전쟁이라고 불린다. 1973년 미국이 중동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시기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을 한다. 

 

 

 

이스라엘 역사 간략정리 (중동 전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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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파동 

전쟁 전에 이집트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 우리가 전쟁을 할테니 석유길을 봉쇄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이스라엘이 밀리기 시작하니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와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폭탄을 지원한다. 그날 많은 산유국들은 생산량을 떨어뜨려 버리고 이스라엘 편의 국가들 미국과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의 석유를 철저하게 막아버리는 석유 수출 금지를 한다. 수출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석유 파동이다.

 

 

1973년 제 1차에 오일쇼크는 전 세계에 충격을 준다. 석유 생산을 줄이니 유가가 올라 당시 70%까지 급등한 유가였다. 4차 중동전쟁 전에 유가 가격은 1배럴당 2만원이던 것이 전쟁이 시작된지 2달 이 된 12월 달 유가는 2만원-> 8만원으로 오르며 국내 석유값이 4배나 올랐고 우리나라 중소기업 3분의 2가 도산을 했다.  IMF 이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미친 제 1차 석유 파동으로 석유를 가진 산유국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석유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여기서 미국은 1차 오일 쇼크로 혼란스러웠던 와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을 만나 석유를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비밀협약을 맺으며 실속을 챙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 혁명 (1979년)

그러나 중동에서 미국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함께 산유국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이란에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다. 미국의 지원과 막대한 석유 이윤으로 부를 축적한 팔레비 왕조는 비밀경찰 사바크가 지배하는 탄압 정치로 일관하며 이슬람 원리의 전통을 붕괴시켰다. 이에 국민이 친미 성향이 강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의 중심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슬람 공화국을 탄생시킨 혁명이다. 

 

이란 친미->반미 정권수립 

이슬람 혁명은 이란을 완전히 바꿔놓는다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 양대 기둥이었다. 그러나 양대 기둥 중에서 사실 미국이 더 공을 많이 들였던 이란이 혁명으로 반미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성립 후 국민 대다수가 원했던 왕권의 붕괴되면서 최고 지도자로 이란을 통치하게 된 아야톨라 호메이니이었다 

 

 

 

문제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바로 이라크로 혁명이 번질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라크 악의 축으로 불렸던 문제의 인물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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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사담 후세인과 이란-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과 이란-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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