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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사담 후세인과 이란-이라크 전쟁

by 365 ^^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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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4-2]

사담 후세인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군대를 간 적이 없는데 훈장이 주렁주렁이었고 거의 모든 방송에 군복 차림, 총은 필수, 발포까지 했다. 이것은 과거 무력을 쥔 사람에게 복종하는 문화가 강했던 중동의 한 문화로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된 군복과 훈장이었다.

 

사담 후세인의 공포정치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사담=저항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담 후세인이였으나 국민이 항거하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대통령 취임직후에 당원들을 한 장소에 모이게 한 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고 바로 경찰이 와서 끌고 나간다. 이때 68명이 끌려나가서 22명을 처형했다. 

 

 

또한 후세인 찬양의 노래를 200개 정도 만들어 사람들에게 부르게 했고 해마다 국민에게 자신의 동상을 선물했던 사담 후세인이었다. 이라크 전역을 사담 후세인의 동상과 포스터로 도배를 했고 철저한 전제국가를 꿈꿨던 인물이다. 또한 고문이 무시무시하기로도 악명이 있었는데 담뱃불로 눈지지기, 혀 뽑기, 10M에서 떨어드리기, 가슴에 폭탄 매달아 처형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반대파를 제거했다. 

 

 

미국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을 가리켜 ‘환생한 히틀러’ 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이라크에는 아랍어를 쓰지 않고 다른 말을 쓰는 쿠르드족이라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1987년에 쿠르드인들이 살고 있는 할랍자에 화학무기를 사용한다. 그때 약 5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여성과 어린이가 75%였다.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쓴 독재자는 사담 후세인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실제로 후세인이 집권하는 동안 죽고 학살당한 이라크 국민수는 30만 명이상이었다. 

 

 

이란- 이라크가 협정

 

이런 잔인한 사담 후세인의 골칫거리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 이란이었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 강 지역이 흘러 다시 만나 물줄기는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는데 문제는 이 지역이 이란, 이라크의 석유 수출 통로로 이곳의 국경 경계가 애매했다.

 

 

갈등의 시작은 1937년에 이란과 이라크가 협정을 맺지만 1937년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라크였기 때문에 사실상 영국과 이란의 협정이었던 것이다. 이란 항구로 들어오는 배와 수로 사용료 모두 이라크 관할이었기 때문에 이란에게는 억울한 협정이었다. 1937년의 조약은 무효라고 이란이 선언하자 1975년에 수로 가운데를 국경으로 하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한다. 그런데 사담 후세인이 1979년 이 조약을 무효라 선언한다.  

 

 

이란 공격

그리고는 1979년 이란혁명 다음해 1980년 9월 22일날 갑작스럽게 이란을 공격한다. 약 60%의 시아파로 구성된 이라크 국민들에게 만행을 저질러 온 수니파였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혁명이 이라크에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해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킬것을 우려했고 이란땅에서 나오는 석유도 탐이 났던것이다. 

 

시아파와 수니파란?  
이란은 국민들 대다수가 시아파이다. 이라크는 수니파 20%. 쿠르드 20%, 시아파 60%로 민족이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존경받는 예언자를 무함마드라 부른다.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후계자를 잇는 문제에서 대립이 발생하는데 수니파는 예언자께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를 선출, 시아파는 창시자의 직계 혈통을 지도자로 선출해야 한다는 파이다. 

 

이란 이라크 전쟁 (1980년 9월 22일)  

 

사담 후세인은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이라크의 군대는 중동 최강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8년동안 계속된다. 한 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았다. 당시 이라크를 미국이 도왔다.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특사로 사담 후세인을 만난 도널드 럼스펠드(1983년 12월 20일)는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협력을 논의한 양국이었다.

 

 

미국이 타격을 할 위치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화학무기도 사용하며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만 돕지 않았다. 이란에도 무기를 공급했던 미국이었다. 이슬람 혁명으로 반미정권이 된 이란이기에 미국은 어떤 나라도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살상만 남은 전쟁으로 끝이 난다.  

 

8년간의 이란,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를 완전히 파산 지경으로 몰고 갔다. 이라크의 경제적 손실이 무려 173 조원의 부채가 34조원이었다. 파탄난 이라크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사담 후세인이 또 한번 무리한 도박을 하게 된다.  이라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찾은 해결책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목한 나라는 쿠웨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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