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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쿠웨이트는 ‘작은 요새’란 뜻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라크 접경에 위치한 페르시아만의 입헌군주국이다.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한 크기의 작은 국가지만 석유가 많이 나와 석유부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원래는 작은 부족 국가였으나 20세기부터 석유가 나오고 근대화를 급격히 추진하면서 중동에서 중요한 나라가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 후 유가의 가격은 1배럴당 35달러였던 것이 14달러로 떨어지면서 석유 과잉 공급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유가를 올리기 위해 주변 산유국에 공급량을 줄이라고 요청하지만 어떤 나라도 듣지 않는다. 더구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옆나라 쿠웨이트는 보란듯이 석유를 더 생산했다. 이런 쿠웨이트에는 이라크와 유전이 국경과 붙어있는 곳도 있었다.
이라크의 무리한 요구 조건들
이라크에서 규모가 큰 유전 중 하나인 루마일라 유전이 80~90%는 이라크 쪽에 있고 10~20%는 쿠웨이트 쪽에 있었는데 전쟁으로 이라크는 유전 채굴을 못하는 사이 쿠웨이트는 열심히 거기를 채굴을 한다. 쿠웨이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전쟁에서 쓰라고 돈을 이라크에 빌려줬는데 사담 후세인이 빌린 돈 탕감을 요구하지만 어떤 나라도 탕감을 해주지 않자 쿠웨이트에 루마일라 유전에서 채굴해간 석유 배상금과 쿠웨이트에 빌린 15조원 탕감을 요구한 것이다.
또 쿠웨이트의 와르바섬과 부비안 섬을 요구한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이라크는 페르시아만으로 나올 수 있는 곳이 이 섬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역의 요충지인 두섬이 꼭 필요했던 이라크였다.
이 섬을 요구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쿠웨이트는 영국에 빼앗긴 원래 이라크 땅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1961년 영국의 도움으로 독립국 지위를 획득한 쿠웨이트였다. 사담 후세인의 주장은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19번째 주라는 주장이었다.
사전 포섭작전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전쟁을 위한 사전 포섭에 나섰다. 사담 후세인은 전쟁을 준비하며 여론을 좋게 만들기 위해 주변각료들과 기자들에게 우호적이 여론 형성을 위해 외제 자동차를 준다. 이집트 대통령에게는 이집트 농민을 위한 약 286억 원어치 밀 구입을 제의했다.
걸프전의 원인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2일 새벽 2시에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갔다. 도착한지 반나절 만에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쿠웨이트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빠르게 점령당한 후 19번째 주로 편입하고 쿠웨이트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언한다.
쿠웨이트는 마지막 보루가 있었다. 1991년 1월 9일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네바에서 국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시작한다. 미국은 이라크 주도하에 국제 연합군의 분열을 걱정했지만 이라크의 강경한 태도는 6시간의 회담을 결렬로 마무리 했다. 그리고 UN은 이라크에게 1월 15일까지 철수를 명령했으나 이라크의 거부로 전쟁의 위기는 점점 현실로 되어갔다.
사담 후세인의 오판
쿠웨이트를 차지한 사담 후세인의 자신감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는 쿠웨이트를 공동묘지로 만들겟다고 경고했다. 사담 후세인 생각에 다국적 연합군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올것이라고 생각해서 사우디 국경선쪽에 지뢰를 50만개를 설치한다.
또한 미국은 쿠웨이트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미국이 패배한 전쟁으로 15년간 미군 사상자만 6만여 명에 달했다.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로 미국은 섣불리 전쟁을 못 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반면에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군인이 죽는 것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국적 연합군 참전
그러나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빗나갔다. 미국은 다국적 연합군을 결정(전 세계 39개국 참전)하여 대규모 작전을 펼친다. 38개국중 직접 전투에 참가한 국가는 무려 28개국 60만 명이었다.
전 세계를 이렇게 취합해서 쿠웨이트를 지키려고 했던 그 속내는 주요 석유 생산국은 너무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가 잘못되면 이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가 흔들리고 모든 나라들이 그 석유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있다.
이 전쟁에서 연합군의 걱정은 화학무기였다. 그래서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화학무기를 쓴다면 핵을 사용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미국은 본격적으로 전쟁 태세에 들어간다. UN을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라크에 1월 15일 자정까지 군대를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한다. 그러나 이라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걸프전 시작
그래서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의 군사작전이 시작된다. 다국적 연합군이 동원 군용기만 약 750기였고 공습 첫날 목표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무기들의 등장이 실시간으로 방송에 보여진다.
시설을 파괴했고 24시간 내 미국의 cnn 을 통해서 전 세계로 송출된다. 인류 역사상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CNN은 80년대 초반에 설립돼서 미국에서 최초로 24시간 뉴스 채널을 시작한다. 그때 걸프전이 터지면서 걸프전쟁을 통해 24시간 생중계되면서 미국 보도 전문 채널이 된다.
그러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까지 정제 없이 공개되는 단점도 있었다. 군 시설로 오인한 대피 시설에 오폭 사고가 발생해 민간인인 400명 정도 사망한 아말리 방공호 오폭 사고는 여과없이 중계되었다. 모든 것이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은 왜 생중계를 했을까?
미국은 생중계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패전국 이미지를 씻고 강대국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생중계를 볼때마다 사람들은 실감했다.
공습에 밀린 사담 후세인은 다국적군의 공습을 막기위해 유전을 불태웠다. 유전에서 나오는 상상초월의 검은 연기로 인해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공습에 거의 효과는 없었다. 대책없는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1991년 2월 23일 약 한달 간의 공습을 중단하고 이라크군 소탕을 위해서 전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한다. 다국적 연합국이 생각한 골든타임은 4일이었다.
최신 GPS 위성 신호를 활용 신속, 정확하게 기갑 부대를 이동했다. 이라크는 소련재 탱크(T-72M)로 무장을 했고 다국적 연합국은 최고의 미국 탱크(M1A1 에이브람스)으로 무장했다. 여기에 전차 천적 아파치 공격헬기까지 가세하며 이라크 정예부대는 괴멸된다. 12821발의 포탄과 5634발의 로켓에 이라크는 초토화됐다.
이라크의 이스라엘 공격
이에 화가 난 사담 후세인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사담 후세인은 다국적 연합국을 와해시켜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중동 지역 전체의 전쟁으로 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쿠웨이트 철수 압박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철수하면 이라크도 철수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있었다. 자신의 전쟁을 전체 아랍 전쟁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을 썼던 것이다.
후세인 항복
이스라엘은 공격을 당했으나 보복을 하지 않았고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스라엘이 도발을 했다면 더 큰 전쟁이 됐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연합군은 4일째 되는 날 쿠웨이트를 완전히 접수하며 1991년2월 28일 사담 후세인은 항복을 한후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철수한다. 걸프전쟁에서 죽은 이라크 군인은 약 20만 명이 희생되었다. 미군 사상자는 약 150명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철수하면서 쿠웨이트 유전에 불을 질러버린다. 쿠웨이트 유전 700개 중 600개에 방화를 하고 간 것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검은 연기로 인해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치명적인 유독가스로 인해 건강 및 환경파괴가 심각했다. 세계 최고의 부국이었던 쿠에이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렸다.
죽음의 고속도로
전쟁이 마무리됐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발전한다. 항복 후 쿠웨이트에서 빠져나오던 이라크군의 퇴각행렬을 밤에 미국과 캐나다 공군 및 육군 병력이 폭격하여 차량 140~200대 가량이 파괴되고 수백 명의 이라크 병사가 사망한다. 걸프전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죽음의 고속도로 사건이다. 이후 미국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 중단 선언을 한다. (아버지 조지 부시대통령) 전세계 충격을 안겨줬던 제 1차 걸프전쟁은 미국과 동맹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걸프전쟁 이후 사담 후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사담 후세인은 자국에 돌아가서 국민들에게 이라크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전한다. 사담 후세인은 반미 감정을 앞세워 다시 한번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미국에 도전할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무력은 이미 패배했기에 석유로 도발을 하려한다. 그 방법은 석유 판매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유로화 가치는 급상승(무려 17%) 하며 미국 경제 패권에 도전했던 사담 후세인이었다.
9.11테러
그리고 나서 2003년 9.11 테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약 3000명의 사망자와 25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미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최악의 테러 사건으로 손꼽힌다. 당시 이 사건으로 미국은 충격에 빠지고 미국인들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안겨준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을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을 잡기 위해 미군은 아프칸니스탄으로 들어간다.
2차 걸프전
물론 뜬금없이 갑작스런 이라크 공격에 반대 여론도 많았으나 9.11 테러에 의해 어떤 심판이든 찬성하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미국 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는 제 1차 걸프전쟁을 했고 43대 대통령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는 2차 걸프 전쟁을 감행한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빌미를 삼아 이라크와의 전쟁을 감행했지만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다. 2차 걸프전도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담 후세인 생포
이라크 내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자취를 감춘 사담 후세인을 찾기 위해 미국은 600명이 넘는 특수 정예부대를 파견해 사담 후세인의 은신처를 찾는다. 2500만 달러 현상금 (무려 280억원) 그의 아들들은 각각 1500만 달러(한화 약 170억원) 현상금이 달렸으나 이 사람을 숨겨줬던 사람의 제보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은 사살되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티크리트 외곽 농장에서180cmX240cm 벙커에서 2003년 12월에 생포된다.
사담 후세인 사형
그 후 재판을 받은 사담 후세인은 재판을 받는 동안 거친 발언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일삼으며 결국 10만 여 명의 시아파 주민을 무참히 죽인 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2006년 12월 30일 새벽에 교수형을 당한다. 그렇게 23년간의 사담 후세인의 독재 정치는 막을 내렸다.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 역시 2011년 5월 파키스탄의 수도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e.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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