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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이토 히로부미 암살한 하얼빈 의거의 안중근 의사

by 365 ^^ 2020.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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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4회]

 

오늘의 탐사지: 러시아 우수리스크 

주제: 안중근 로드
출연자: 설민석 

 

 

 

Q. 안중근 의사의 아명(어렸을때 부르던 이름)은 무엇이였을까? 

 

A. 안응칠

 

 
그가 좋아했던 4가지는 친구들과 놀기,사냥,음주가무, 말타기 (스피드광) 한마디로 노는 형이였다. 
 
 
 
 
 
안중근의 어린시절 
 
놀기 좋아한 만큼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안태훈이라고 진사였다. 

 

소과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는데 문관 집안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안중근과 달리 동생들은 공부를 잘했다.

 

 

 

어머님의 성함은 조마리아였던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천주교 집안이다. 

 

 

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은 토마스였고 그래서 호가(토마스) 도마 안중근이다.  공부를 멀리하고 놀기 좋아하는 문관집안 장남이면 보통 어머니는 난리가 났을 것인데 이런 안중근 의사를 단 한번도 혼낸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안중근의 유년기
 
무예가 출중한 안중근 의사는 아버지와 함께 16살,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운동인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나서는데 그곳에서 안태훈(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는 김창수(=김구 선생 )를 만난다. 안태훈은 당시 동학농민 운동을 지휘했던 김창수(=김구)를 집으로 데려온다. 
 

 

 
16세의 안중근과 19세의 김구는 그렇게 만났다. 
 
 
 
안중근의 청년기
 
청년기를 맞은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와서 최재형 선생을 만나고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회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의병들을 이끌고 여러차례 두만강을 건너서 일본군을 수차례 격파한다. 그런 안중근 의사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일본인 포로를 사로잡았는데 의병들은 죽여야한다고 말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반대하고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며 포로를 풀어준다. 

 
그리고 나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배를 하고 그 이후 아무도 안중근 의사를 따르지 않고 아무도 안중근 의사에게 군자금을 대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현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결단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와 뜻 맞는 동지 12명이 모여 의병운동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고 다시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왼손 약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에 12명중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모두 손가락을 자른 뒤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다. 

 

 
왼손 약지를 자른 이유(단지 혈서)
 
총을 쏘는대 힘들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추측되며 신문사에서 글도 쓰고 그 신문을 팔고 조용히 활동을 이어가던 중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 계획을 논의를 한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네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참여한다. 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이다. 

 

 

최재웅 선생님은 재정적 지원으로 권총을 마련해 주시고
크기가 작을수록 떨어지는 명중률.

 

유동하 선생은 당시 18살 학생이었고 어려서 연락책을 담당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경유지 채가구역에서 대기한 우덕순, 조도선과 여기서 실패시를 대비해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대기 하기로 한다.

 

 

그렇게 채가구역에서 도착한 세 사람은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를 그 순간, 작별인사를 했다.  그 장면을 러시아 경비병이 목격하게 된다. 

 

이를 수상히 여겨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가 채가구역을 올 때 우덕순, 조도선 두 사람이 묵었던 숙소를 확인 후 채가구역 내 그들의 여관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다. 그래서 채가구역에서의 거사 실패 하고 그래서 결국 안중근 의사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그렇게 다가온 거사 당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집결한 러시아 의장대,

 

하얼빈역에 도착한 기차는 30분이 지난 뒤에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장관과 환담하느라 내리지 않자 안중근은  너무나 초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누군지 몰랐다. 얼굴을 모르고 행색과 묘사 등으로만 실행에 옮긴 작전, 믿을 수 없이 열악했던 상황, 가까이 볼수도 없는 상황, 맨 앞에 가는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 같은데...

 

 그때 한 일본인이 환호를 했다. 이토 히로부미 !!! 

환호 소리에 고개를 돌려 화답했다는 이토, 

 

그때 품속에서 권총을  빼들면서 10보 밖에서 정확히 이토의 흉복부에 세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정확히 이토의 가슴과 배를 관통하고 이토가 쓰러진다.

 

 

 

아직 남아 있던 총알로 쏜 대상이 이토가 아닐 수 있으니 주변에 비슷해 보이는 일본인에 발포한다.  남은 총알에 맞은 수행비서관,하얼빈 총영사,만주 철도 이사 부상당했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몸을 피할텐데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꼬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를 외친다.

 

외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일본은 이 사건을 안중근 개인의 원한으로 왜곡,폄하한다.  

 

 

 
 
 
안중근의 죽음
 
안중근은 재판을 받게 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암살을 결행한 것이며 15가지 이유를 들어 이토를 처단했음을 재판 중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 일대기 다룬 연극 
<나는 너다>의 대사 중  
 
재판중 안중근이했던말(송일국버전).mp3
다운로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빛나는 별.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말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이유

 

하얼빈이라는 곳이 청나라가 간섭할수 없는 러시아 관할지였다. 거사를 치르고 난 뒤 심판을 받게 되면 러시아 법관에게 심판을 받겠구나 계산해서 러시아 법정에서 공정한 법정 투쟁을 원했던 안중근 의사였지만 반전이 있다. 
 
 
 
하얼빈 의거가 있었던 1909년도 하얼빈 의거 4년전 1905년에 있었던 일 을사늑약, 그 내용은 바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가져간다. 이것은 외국에 있는 한국인도 일본이 관할해 재판하겠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형법을 적용하여 안중근 사형, 나머지 세명은 징역형 선고를 받는다.

하얼빈 의거 4명의 독립투사들

 

순국 5분전 의연한 모습의 안의사

 

 

남은 안중근 가족들 

 

안중근이 사형당한 이후 안중근의 가족을 최재형 선생이 끝까지 돌봐줬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의 딸 올가의 증언

 

 
안중근의 첫째 아들 안문생은 어릴때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군 첩자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
 
 
안중근 의사의 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언은 독립이 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이장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는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안중근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았고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 가묘를 만들어놨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빈 무덤)는 현재 효창공원에 위치해 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의거

 

이봉창 의사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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