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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의거

by 365 ^^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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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7회 2부]

 

오늘의 탐사지: 중국 상해 

주제: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 
출연자: 설민석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김구는 의열 투쟁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돈도 무기도 군대도 없기 때문에 적은 인원으로 일본의 주요인물을 제거하여 침략을 좌절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항일독립운동을 꾀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이봉창의사

어느날 일본인 행색에 의심했지만 강점기에 태어났지만 독립운동 위해 상해까지 넘어 온 31세의 솔직하고 진실된 청년이었다. 마지막에 김구로부터 엄청 큰 돈을 받았는데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하며 의연하게 의거를 거행했으나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한일애국단의 또 다른 영웅
윤봉길 의사
 
이봉창의사 의거는 비록 실패했으나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된다.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이봉창의사 의거가 알려지고 어느날 윤봉길이 임시정부를 찾아온다. 김구는 윤봉길을 원래 알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채소 장사하던 윤봉길이 찾아왔고 윤봉길은 독립운동의 의지를 고백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공부에 재주가 없던 윤봉길 의사였다. 그러나 12살 때 일어난 삼일운동이 일어나는데 일본 군경에게 마구잡이로 당하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이 보였고 왜 맞아야 돼는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일본사람 되라는 학교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퇴한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이후 서당에서 한학에 매진한다. 그때부터 공부를 너무 잘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인 묘표를 안 한 아름 들고 찾아와 말하길 글을 몰라 무덤을 찾지 못하니 아버지 무덤을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문맹퇴치의 시급함을 느끼고 교육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야학당을 개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이후 월진회라는 단체도 만들어 교육 일을 하다가 직접적인 의거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망명의 길을 오르게 된다. 그때 남기고 간 글이다.
 
 
장부출가생불환.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떠났고 윤봉길의 어머니는 얼굴이라고 보고 떠나라고 했으나 윤봉길은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처음에 충격을 받았으나 윤봉길의 결의를 받아들인다.

 

윤봉길의 청년기
 
이렇게 떠날 때 여비가 필요했던 윤봉길은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전부 모아 빌린 돈을 다 갚았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화약 조절에 실패했던 원인이 있어 수포로 돌아간 이봉창의사의 실패를 바탕으로 폭탄을 제대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날 윤봉길에게 기회가 오게 된다.
 

 

당시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중국은 만주를 빼앗긴 직후라 이봉창 의거는 상해에서 난리가 난다. 중국 내 항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중국인이 일본인 승려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항의시위가 거세지며 일촉즉발 충돌 위기까지 가게된다.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군함을 들이밀고 상해를 기습공격 들어온다. 1932.1.28일 1차 상해사변 발발한다.
 

 

 
대항하던 중국군에게 일본은 항공모함을 띄워 무차별적 폭격을 가한다. 이에 중국군 전원 무장해제가 되고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이에 일본은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행사를 계획, 마침 일왕 생일도 있으니 주변 공사관의 만류에도 상해 내에서 기념행사를 하기로 한다.

 

남의 나라에서 승전식을 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고 우리에겐 이때가 기회가 된것이다.
 
 
훙커우 공원 의거 D-3
 

 

 
훙커우 공원 의거 삼일전 날에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선서식을 한다.

 

 

훙커우 공원 의거 D-2

 

 

거사 이틀전에 총 3장의 사진을 찍어서 남긴다.

 

역사에 남겨서 또다른 후배들이 독립운동의 뜻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촬영을 마친다.
 
훙커우 공원 거사 D-1

 

거사 전날이 되어 전승기념행사와 일왕 생일 축하연 참석을 위해 일장기를 준비한다. 날씨 때문에 신문에 새로 공지됐던 준비물이 도시락과 물통을 지참하라는 내용이 보도되고

 

폭탄으로 만들기에 가장 용이했던 수통.도시락 폭탄을 준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주요인사들의 사진을 준비한다.
 
훙커우 공원 거사 D-0
당일 아침
 

 

<원창리 13호> 홍커우 공원 의거 당일날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식사를 하고 마지막 만남을 가졌던 곳으로 현재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윤봉길 시계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 식사 후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기 전에 김구 선생님의 시계를 보고 말하기를
'제 시계는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니 바꿉시다.'
 
의아한 김구에게 윤봉길이 답하기를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목숨 건 거사를 앞두고 태연했다.
 
현재 윤봉길 시계는

 

 

 
2006년 백범 탄신 130주년 기념 특별전 때 시계가 만난다.

 

시계를 바꾼 후 밖으로 나온 두 영웅은 큰 길을 따라 택시를 잡으려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김구선생님에게 쥐어 주는데 차비를 제외한 수중의 돈을 쥐어준다. 김구는 유봉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 의사의 유언시
 
갓난 아이를 둔 윤봉길은 김구의 부탁으로 두 아들에게 유언 시를 남긴다.

0123456

 

그러나 이 편지는 두 아들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1970년대에 일본에서 유족에게 전해졌고 현재는 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윤봉길 의사의 유언 시이다.
 
윤봉길 의사의 유언시
윤봉길 의사의 유언시

 

 

 
훙커우 공원
훙커우 공원
훙커우 공원

 

훙커우 공원2
훙커우 공원 2
루쉰공원
루쉰공원

 

윤봉길 의사 거사 추정지
윤봉길 의사 거사 추정지

 

홍커우 공원 의거

 
오전 7:50 일본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오는데 입구에서 잡힌다. 입장권 보여달라고 하자 태연하게 나는 일본사람인데 일본사람이 무슨 입장권이 필요하냐며 의기양양하게 걸어 간다. 중국에서 일본 세탁소에 취직해서 일했기 때문에) 완전 원어민 발음을 구사했었다.
 
당시 공원에는 3만명의 인파가 몰렸고 군경의 경계도 삼엄했다.
훙커우 공원에 약 3만명 인파 몰림
훙커우 공원에 약 3만명 인파 몰림

 

단상에는 전범들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 표적
윤봉길 의사 표적

 

윤봉길은 인파를 비집고 단상 20M 앞까지 접근했다.

 
10:30분 일본군의 열병식이 시작되고
일본군 열병식
일본군 열병식

 

운명의 11:40분
 
기미가요가 나올 때 조금씩 앞으로 파고들어가서 5m 앞에서 수통 폭탄을 던진다.

 

 
이 폭탄이 정확히 단상으로 떨어지고 굉음과 함께 수통폭탄은 폭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실명,다리절단등 중상을 입거나 즉사하는 등 거사는 성공을 했다.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패망한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할 때 미국 군함에서 항복문서를 작성했던 다리를 절었던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스마모루의 상흔이 바로 윤봉길 의사 의거때 생긴것이다.

시게미스마모무 당시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스마모무 주중일본공사
미국전함미주리호
미국전함미주리호

 

윤봉길 의사의 체포
폭탄 터지자마자 자결용 폭탄을 쓰기도 전에 바로 제압당하고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일본헌병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모습의 윤봉길의사
일본헌병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모습의 윤봉길의사
일본헌병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모습의 윤봉길의사
일본헌병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모습의 윤봉길의사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다.

당시 신문에 실린 현장체포된 윤봉길의사
현장체포된 윤봉길의사

 

그리고 1932년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윤봉길 의사의 호는 '매헌' 으로 유학자 성주록의 서당인 오치서숙에서 공부를 마친 후

 

매죽헌 성삼문의 의기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스승님이 지어준 호가 '매헌'이다. 마지막 순간이 소름끼치도록 성삼문과 똑같았다.

 

 
일본 내무성 작성문서의 윤봉길 의사의 심문기록을 보면
 
폭탄을 던진 이유를 묻자
 
나같은 사람이 한 두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따라서 이번의 사건이 독립에는 당장 효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의거로 인해 조선인들이 깨어나고 각성하길 촉구하고 전세계에 우리 조선은 일본과 다름을 명명백백히 하기 위해서 내가 전범들을 죽인 것이다'
 
라고 기개를 잃지 않고 의거의 목적을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만약에 2차 세계대전이 오면 각 민족은 독립할 것이다 라고 예언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독립을 내다봤던 윤봉길 의사였다.
 
이 사건은 해외 언론 및 국제 사회도 주목하게 된다.

 

 
 
윤봉길 의사
순국의 순간
 
무릎 꿇고 십자가 형틀에 묶여있고 사수의 총탄이 윤봉길 의사의 미간을 관통한다.
윤봉길 의사 처형장면

 

이마에 두른 하얀띠 위에 피가 고이며 일장기 모양이 되도록 했던 의도로 순국마저 욕되게 하려 했던 일제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봉분도 만들지도 않고 평평하게 평지를 만들어 쓰레기장 옆에 묻고사람들이 밟아 모멸감을 느끼도록 비인도적 처사를 자행했다.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광복이후 박열 열사 등은 1946년 윤봉길 의사의 유해 발굴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보고 모두가 통곡했다고 한다.
윤봉길의사 유해찾기
윤봉길의사 유해찾기

 

 

 
윤봉길 의사를 포함한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는 1946년 5월15일 고국으로 봉환되었고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조국에 잠들었다. 현재는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삼의사의묘
삼의사의 묘

 

순국 직전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으나 ' 할 말 없다!' 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 했다.
 
 
훙커우 공원 내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윤봉길 의사 의거의 역사적 의미
 
매헌 기념관
매헌 기념관

 

 
대한민국 임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상해 한복판에서 무리하게 승전행사를 하는 건 중국 자존심을 긁는 행위였는데 거기에 비수를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이런 일을 해내니 중국 장제스가 감격하며 놀랐고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심을 보여 김구 선생님이 장제스를 만나기 되는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을 약속했으며 침체기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고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 후손들이 의거를 교훈삼아 각성하고 강해지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 하얼빈 의거의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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