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1912년 왕실의 막내이자 외동딸로 태어난다. 그때 고종 나이 60세로 환갑을 맞던 해이다. 고종은 이 늦둥이 딸을 너무 예뻐했다.
고종의 옹주 사랑
보통 아기가 태어나면 왕은 일주일 뒤에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고종은 바로 다음날 찾아갔다. 생후 2개월 된 덕혜옹주를 왕의 침전 옆인 함녕전에 옮겨 오도록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덕혜옹주를 보러 함녕전에 들렸다고 한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옹주만을 위한 왕실 유치원을 설립한다.
준명당에 난간에 파인 홈은 덕혜옹주가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다.
덕혜옹주의 어린시절은 명랑 발랄했고 밤을 줍는걸 좋아했고 시중들 앞에서 노래와 춤추는것을 좋아했다. 8살 전까지가 덕혜옹주의 전성기라고 말할수 있다.
옹주의 왕실 족보 입적 위한 고종의 노력
이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덕혜옹주가 왕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나라를 뺏긴 후 일본 황실 아래 속해야 했던 조선 왕실은 덕혜옹주가 입적되기 위해선 총독부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총독부는 덕혜옹주의 출생을 알았지만 입적 문제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유는 후궁의 딸인 덕혜옹주를 입적하게 되면 모든 조선 왕실 자손을 입적해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일본 황실 입장에선 관리가 어려워져 조선 왕실이 늘어나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덕수궁으로 초대해서 직접 덕혜옹주를 소개시켜 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덕혜옹주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에 반해버렸다.
그 후 덕혜옹주는 완전히 왕가에 입적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덕혜옹주에게 시작된 비극의 삶의 시작이었다.
덕혜 8세
아버지 고종의 죽음
덕혜옹주가 8살 되던 1919년 아버지 고종이 승하한다. 항상 아버지 품에서 살았던 덕혜옹주는 그런 아버지가 독살설과 함께 돌아가신 것이다. 그로 인해 덕혜옹주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고종의 승하 후 덕수궁에 있던 고종의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덕혜옹주도 아버지의 신위가 있는 창덕궁 관물헌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때가 아버지를 잃은 8살 무렵이었다.
덕혜 9세
소학교 입학
1921년 덕혜옹주가 만 9살이 될 무렵 초등학교인 소학교를 들어가게 되는데 경성(서울)에 있던 일본인 학교인 일출 소학교에 입학한다.
덕혜 14세
강제 일본 유학
고종의 승하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은 조선왕실을 없애기 위한 본색을 드러냈다. 덕혜옹주를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 왕실의 자녀들은 일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보낸다. 결국 14살에 덕혜옹주는 조선을 떠나게 된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 이은이 황태자로 책봉 되자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강제로 일본에 보내졌기에
덕혜옹주도 똑같은 일을 겪을것을 염려해 고종은 덕혜 아기 시절에 자신의 심복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를 추진시켰으나 고종의 승하로 약혼은 무산이 되었다.
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은 일본 육군 사관학교(군사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게 되고 1949년 일본 고위 장교가 되고 그 후 일본인 이방자와 결혼한다.
이렇게 이미 일본에 있던 오빠 영친왕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덕혜를 만난 이방자 여사는 훌쩍 커버린 덕혜 보다 더 놀랐던 것은 말수를 잃어버리고 무표정과 무언으로 일관하던 덕혜의 모습이었다.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가 덕혜옹주를 보고 남긴 기록
가족과의 이별
그렇게 일본 생활을 하던 와중에 오빠 순종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되고 1926년 영친왕과 함께 급히 귀국하게 된다.
순종이 다시 괜찮아지자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 만에 재차 귀국해 순종을 간호하지만
덕혜 15세
결국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한다. 순종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일본이 허락하지 않아 덕혜옹주는 오빠 순종의 국장을 보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난다.
덕혜 18세
어머니의 죽음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의욕 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1929년 5월 30일 어머니 양귀인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 검은 상복을 입고 귀국한 덕혜옹주에게 일제는 신분이 천한 어머니 양귀인이기에 일제의 규범에 따라 조선의 예법에 맞지 않는 상복을 입도록 지시한다.
일본의 강요로 상복조차 마음대로 입지 못했던 덕혜옹주였다. 이때 덕혜옹주 나이가 10대 후반 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가족이 다 떠나버렸다.
덕혜 19세
결국 1930년 불면증,신경쇠약, 몽유병등에 시달리며 조발성 치매증(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덕혜 20세
결혼과 소문
1931년 결혼 할 나이가 된 덕혜옹주는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 일본인과 결혼이 결정되고 대마도 도주의 자손인 소(백작) 다케유키와 결혼을 한다. 결혼 후에는 많은 소문이 돌았는데 덕혜옹주의 남편은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에다가 덕혜를 학대해서 덕혜가 점점 미쳐간다는 소문이였다.
소 다케유키는 사실 당대의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소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민심은 일본인과 결혼한 덕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분노한 민심에 조선일보는 덕혜옹주 남편의 모습을 삭제해 보도했다.
덕혜 21세
아이 출산
걱정과는 달리 덕혜는 결혼생활 초반은 행복했다. 1년 뒤 덕혜옹주는 아이를 가지게 되고 딸 정혜 (일본이름 마사에)를 낳게 되지만
딸을 낳은 뒤 조현병 증세가 더 심해지게 된다.
딸 정혜를 돌보던 시녀의 증언에 따르면
덕혜 44세
이혼과 그 후의 삶
그렇게 25년 동안 결혼 생활은 유지됐는데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새로운 헌법으로 작위와 재산상 특권을 잃게 되고 남편은 덕혜옹주를 놓게 된다. 1955년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이혼을 하게 되고 결국 간병을 위해 정신병원으로 덕혜옹주를 옮기게 된다. 그렇게 15년 동안 덕혜옹주는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소 다케유키의 힘들었던 결혼생활을 회고
일년 뒤 1956년 딸 정혜가 결혼하지만 다시 이혼하고 3개월 후에 유서만 남기고 실종된다.
옹주의 말년
광복이 되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6.25 전쟁이 발발한다. 살기에 급급한 상황이었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덕혜의 어릴적 정혼자였던 김장한의 형인 김을한이라는 사람이 연합군 종군기자로 특파원으로 일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는데
어느날 덕혜옹주가 일본의 정신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생의 정혼자였던 덕혜옹주에 마음이 쓰였던 김을한은 덕혜옹주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 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덕혜옹주 귀국을 위해 노력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을 반대해 귀국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에 정부가 수립되고 옛 조선 왕실의 존재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덕혜 51세
귀국
이후에 박정희 의장의 군사 쿠테타 이후에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가게되고 그곳에서 덕혜옹주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덕혜옹주의 귀국이 진행되고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37년 만의 귀국이었다.
유치원을 함께 나온 친구 중 한 명과 어릴적 덕혜옹주를 모셨던 유모 변복동 두분이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덕혜옹주를 보는 순간 이 두분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으나 기억상실증으로 덕혜옹주는 친구도, 유모도 알아보지 못했다.
덕혜 76세
옹주의 죽음
귀국 후에 덕혜옹주는 서울대 병원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게 되고 그때도 병상을 지켰던 이는 유모 변복동님이다.
1962년 기사에 덕혜옹주의 모습이 실렸다.
그리고 4년 뒤인 1966년 순종의 아내 윤대비가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나고 3년 상이 끝난 뒤 덕혜옹주가 낙선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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