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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고종은 독살 되었다! ? (고종 황제 죽음에 대한 독살 의심 증거들)

by 짱신나^^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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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6회]

 

오늘의 탐사지: 덕수궁

제: 고종 커피 독살 사건

 

출연자: 설민석, 문가영

 

 

덕수궁 정문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으나 고종 퇴위 이후 순종이 올린 궁호가 덕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의 '덕수궁'이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에 그린 자신의 어진모습. 

조선시대 왕들은 제후 왕이라 주로 붉은색,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는데 황제만이 황금색 곤룡포를 입었다. 대한제국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 후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고종의 모습이다. 

 

 

 

커피 애호가 고종

 

유길준은 최초의 미국, 일본 유학생으로 미국. 유럽을 순방하며 본 신문물을 <서유견문>에 소개했는데 한국인 최초로 커피에 대한 기록이다.

유길준 서유견문 속 커피에 대한 내용

 

 황실과 대신들 은 그윽한 향과 머리를 맑게 하는 맛으로 왕족과 대신들을 매혹시켰고 한자의 발음을 빌려 표기한 것으로 '가배'로 불렀고

커피 중국어 표기

 

서민들은 서양이 탕국이라는 뜻으로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고종 커피 독살 사건

커피 애호가 고종은 커피를 연회 및 궁중다례의식에 사용할 정도로 커피에 대한 사랑이 넘쳤던 고종인데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맞이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흥록의 커피 독차 사건을 각색한 영화 <가비>

대한제국 선포 1년 뒤 1898년에 발생한 일로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러시아어 통역이 절실했던 상황에 김홍륙이라는 사람이 통역을 하게 된다. 김홍륙은 러시아에 인접한 함경도 출신의 천인으로 러시아에 이주해 생활하며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익힌 후 베베르라는 러시아 공사를 따라서 조선에 입국한다.

 

 

아관파천 후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사로 고속 출세하며 그렇게 대한제국 황실의 통역관이자 고종의 최측근이 된다. 고종에 의해 외교 교섭 임무를 독점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국정 농단을 펼치며 자신의 이권을 챙기면서 권력을 휘른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눈치를 채면서 태형 백대를 맞고 유배를 가게 돼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고종과 아들 순종의 커피에 치사량의 아편을 넣었다.

 

영화 <가비> 커피에 아편 넣는 장면
커피향을 맡고 있는 고종 모습/ 영화 <가비>

 

아들 순종은 다량의 아편이 든 커피를 마신 후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후유증으로 치아 18개가 빠졌다. 그 후 순종은 심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며 무기력증 등 각종 후유증을 안고 살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렇게 고종의 주변에는 온통 적뿐이었던 것이다. 


김홍륙의 커피 사건 이후 고종은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그전부터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나 화룡점정은 커피 독차 사건 이후 모두를 못 믿을 지경에 이른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연희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 감시 하에 고종의 식사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철가방에 자물쇠까지 채운 뒤 고종의 눈앞에서 자물쇠를 개봉하고 그제야 식사를 했던 고종이다. 당시 불면증에 시달렸던 고종은 맵고 짠 음식을 잘 먹지 못해서(간이 없어야 독을 탔는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거라 추측) 야참으로 냉면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커피 독살 사건의 현장
정관헌 

지붕은 동양식 팔작지붕에 전통문양을 가미한 서양식 테라스
김홍륙 커피 독차 사건이 있었던 곳

 

고종의 강제 퇴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된다. 이후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다.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

고종이 승하한 침전 함녕전

1897년 창건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이다. 1904년에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을 포함 덕수궁 내 전각들이 소실됐다가 같은 해 12월에 복원됐다.


함녕전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명성황후의 사진과 옥새였다. 명성황후 시해 후 덕수궁에 전화가 설치되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음성을 들을 수 있단 사실에 놀았던 고종은 명성황후가 잠든 홍릉에 전화를 설치한 후 전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안부를 물어보았고 거기 교환수가 무덤 쪽에 수화기를 대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통화해도 대답 없는 명성황후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에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종 독살설

 

1919년 고종은 갑작스럽게 죽는다. 평소 건강했던 고종이 쓰러지자 우리나라에 파견된 (대한제국 황실 비사) 일본인 관리  곤도 시로스케도 의아해했던 것이다. 

 

고도 시로스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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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시로스케의 기록

 

윤치호 일기에서 고종 독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윤치호 일기> 중 한진창 씨는 광무 태황제가 틀림없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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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독살설은 지금 가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6형제가 망명 생활하며 국내로 들어와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망명 정부 설립 계획을 세우고 은밀하게 작업하던 중이던 시기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이 또한 독살설에 비중을 싣게 되는 부분이다. 

 

고종이 승하하자 3일 동안 백성의 음주 가무를 금하고 40여 일 만에 덕수궁에서 발인했다. 

고종의 죽음은 이후 3.1 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해 독립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고종 관련 내용▼

☞석파정 속 세도정치(순조~철종)/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되다.(1)

 

운현궁과 흥선대원군의 업적(2)

 

 임오군란의 원인과 결과 in 하도감 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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