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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덕수궁 석조전 만들어진 배경과 고종의 외교 활동들

by 짱신나^^ 2021.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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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이야기

  • 석조전 내부모습
  • 석조전이 만들어진 배경
  • 고종이 외교를 위해 대접했던 음식들
  • 루즈벨트대통령딸 앨리스방문이야기
  • 외국인들의 고종에 대한 평가

경운경(덕수궁)은 고종이 마지막을 보냈던 궁궐로 경운궁의 특징은 전통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해 있는 궁궐이다. 동쪽에는 전통 건물,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구본신참(옛 것을 근본으로 해서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이라는 대한제국의 이념, 구본신참의 원칙을 구현한 경운경인 것이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야만과 문명으로 구분되어 서양세력이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 했던 시기였으므로 고종은 서양 건축물을 지으므로써 대한 제국이 문명국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경운궁 안 대표전 서양식 건물

석조전 

석조전이란 돌로 만든 대궐이란 뜻
석조전 건물에 있는  꽃 문양(=이화문)

 

석조전 회랑


석조전 내부


1층 연회장(=업무공간)

연회장

 

중앙홀

당시에 발행된 카탈로그나 신문 사진등을 통해 재현했다.

접견실 

접견실 입구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장식들
귀빈 대기실

 

 

◈  석조전이 만들어진 배경 

 

1904년 덕수궁에 발생한 화재로 다른 궁으로 더 이상 피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불이 나지 않는 석조 건물을 지어보자 해서 만들어졌고 석조 기술이 부족했던 조선이라 석조 기술을 갖고 있는 영국인과 일본인 기술자가 참여헤서 만들었다. 당시 돈으로 300만 원이 들었는데 오늘날 가치로 약 2500억원의 비용이다.

 

화재 후 덕수궁 모습

 

석조건 건립 비용은 어디서? 

 

모든 백성들이 힘든 삶을 살았던 그 당시  석조전을 짓기 위해 백성들의 피땀눈물의 세금으로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탁지부 건물

그 당시 탁지부에서 정부로 들어오는 수입을 황실에게 나눠주었는데 이 금액으로 황실을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황권 강화라는 이유로 황실 수입을 늘리기 시작해 국가의 수입을 황실의 재산으로 귀속시키기 시작한다. 그 역할을 담당했던 궁내부는 그 안에 별도 부서 '내장원'을 두고 정부로 갔어야 했던 수입을 황실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황실 수입으로 돌린 방법은 바로 홍삼 전매사업,각종 산업시설,매관,매직 등을 정부가 거둬들여야 했던 세금을 황실 수입으로 돌린 것이다. 

 

 

 

 


황실은 부자가 되는데 정부는 돈이 없는 상황이 되면서 정부에서 관리들 봉급 줄 돈이 없는 상황까지 되버리니 황실의 돈을 빌려 봉급을 주는 지경까지 되었다. 황실 쪽으로 간 10년간 수입 금액을 따져보니 약 4350만원인데(오늘날 약 1조 9000억원) 지출은 4150만원이었다. 그 돈을 거의 다 사용한 것이다.  


황실 품위 유지비라는 명목하에 사치하는데 써버린 세금 

고종의 생일에 사용된 금액은 20만원 오늘날 돈으로 약 85억.


백성들은 당장 하루 먹고 사는 것부터 걱정하고 있는데 그 피 같은 돈으로 황제는 사치를 고종은 이를 황권을 높이는 필요한 경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백성들의 어려움은 외면한 채 엉뚱한 곳에 쓰인 피 같은 세금이었다..


2층에는 황제의 사적인 공간 

석조전 2층 계단
2층 구조 지도

 

헤이그 특사 파견 실패로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하고 1910년 석조전이 완공되던 해에 일어난 경술국치로 결국 석조전에서 기거하지는 못한 고종이다.


침실 바로 옆방의 서재

고종은 사용하지 않고 아들 영친왕이 임시거처로 사용했던 서재

 

책장,탁자,회전서가 등 황제가 실제로 사용하던 것으로 고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구들이 놓여있다. 20세기 초 러일 전쟁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이 격화되고 주변 열강의 침략 속에서 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이었다. 고종은 중립을 선언하지만 한일의정서,1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등을 요구하며 고종을 압박해오는 일본이었다. 고종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내민것이 외교정책 카드였다. 각국 공사들이나 외국인들이 대한제국에 자주방문을 하자 고종은 그들을 위해 특별한 최고의 음식을 대접한다. 

 

당시 외교를 위해 대접했던 음식들

 

외국 공사들을 위해 12가지 요리로 대접을 했다고 한다. 푸아그라 파테, 안심 송로버섯 구이, 양고기 스테이크, 3종의 케이크와 아이스크림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 당시 식사 시간만 3시간 이상였다고 한다. 

ㅏ푸아그라 파테
양고기 스테이크
안심 송로버섯구이
일본 삿포로 산 치즈

 

이러한 화려한 만찬의 효과는?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 루스벨트 딸 앨리스 방문

 

때는 1905년 9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미국의 아시아 사절단 일원으로 21살 앨리스가 필리핀 일본등을 순방하러 온다.

미국 대통령 딸 21살 앨리스 루스벨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두달 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지지가 필요했던 고종은 미국 대통령 딸 앨리스에게 대한 제국 방문초청을 한다. 앨리스는 고종의 초청에 응한다. 황실 전용 열차를 이용해 그녀를 맞이하고 거리마다 성조기를 매달아 두는 등 엄청난 환대를 했던 고종이다. 


앨리스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음식들

신선로
전복조림
편육
앨리스엑 대접했던 음식들

 

극진한 대우를 받고 돌아간 앨리스인데 하지만 고종이 까맣게 몰랐던 사실은 이미 미국은 일본과 손을 잡은 뒤였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단독으로 맺은게 아니라 그 전에 미국과 협상을 끝낸 상태였던 것이다. 미 국무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의 만나서 체결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두 사람(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서로 인정한 비밀 협약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간 앨리스였던 것이다. 

 

 

그 당시 앨리스가 남긴 글 

앨리스의 자서전 중

며칠 후 궁궐내 유럽식으로 꾸민 장소(중명전)에서 점심을 먹었다. 위층 방으로 안내받아 (접견한 후) 키 작은 황제는 자신의 팔은 내주지 않은채 내 팔을 잡았고, 같이 서둘러 비틀거리며 매우 좁은 계단을 내려가 평범하고 냄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앨리스 자서전 중

또한 그녀는 실수도 많이 했다. 평소 자유분방한 성격의 앨리스는 명성황후의 무덤 홍릉을 방문했을 때 석마에 올라가 사진을 찍은 것이다.

 

왕릉의 석마에 올라타고 있는 앨리스

 

참혹한 죽음을 당한 명성황후가 묻힌 곳인 홍릉, 그 홍릉을 지키는 수호신 석마위에 올라 타 사진을 찍은 앨리스였다. 문화가 다른 나라에 가면 모르면 먼저 물어보는게 예의인데 그런 행동도 없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무시하는거나 마찬가지로 그녀의 방문은 그저 관광에 불과했고 고종의 기대를 비웃듯이 무례한 행동을 했던 앨리스였다. 

 


◈ 외국인 눈으로 본 고종의 평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바라본 대한제국은 나약한 나라였다.

012
루즈벨트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내용

 

같은 외국인 미국인 헐버트가 바라본 고종

0123
호머 헐버트는 외국어 교사이자 고종의 밀사였다. 

이렇게 고종은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을 외부 세계에 황제국의 자격을 증명하고자 외교에 힘썻음에도 결과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해방 이후 덕수궁 석조전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치른 주요 국가들이 한국의 신탁통치와 정부 수립 논의를 위해 미군과 소련의 대표단이 모이게 된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주로 활동했던 곳이 덕수궁 석조전이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회담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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