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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임오군란의 원인과 결과 in 하도감 터(3)

by 365 ^^ 2020. 9. 19.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5회]


오늘의 탐사지: 동대문역사 문화공원 안 하도감 터 

주제:  임오군란의 원인과 결과 
출연자: 설민석 




임오군란의 원인 

대원군의 정책 중 국방 분야에 일본인 교관을 초빙해 특별한 기술을 가진 군대 별기군을 창설로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신식 군대였다. 기존에 있던 군대는 5군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군영인 무위영,장어영으로 축소 통합시켰고


구식군대 군인에게 봉급이 나오지 않았다. 

선혜청에서 관리한 군인들의 봉급은 당시 선혜청의 우두머리였던 민씨 세력의 민겸호였는데 세자 시절 순종의 결혼식을 앞두고 결혼식 비용의 상당량을 선혜청 예산에서 충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구식군대의 밀린 봉급이 13개월 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아픈 순종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굿에 빠져 무당(진령군)을 불러들여 과다한 종교행사를 벌이고  국고를 낭비한 것이다. 


게다가 여흥 민씨 세력은 조직적으로 수탈까지 하는데 당시 민겸호가 횡령한 금액은 쌀 10만 석 정도로 오늘날 금액으로 3조 5천 억원 정도였다. 

13개월 치 밀린 봉급에 분노하기 시작한 구식 군대 군인들을 진정시키려 밀린 봉급을 쌀로 주기로 한다. 그러나 그렇게 봉급으로 준 쌀은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욱 분노가 쌓인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향하고 항의하는 군인들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주도했던 군인을 포도청에 가두고 고문한 뒤 처형을 한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은 1882년 임오년 6월9일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다.
 


임오군란의 원인 밀린 임금,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 대우로 인해 폭도로 돌변한 군인은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지만 민겸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임오군란의 과정 
그래서 이들이 대원군의 집으로 찾아가 군인들은 사태 수습을 호소하며 행동지침을 받고자 했다. 이에 밀린 봉록미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고했지만 뒤로는 군인 중 주동자들과 비밀리에 계략을 세운다.


지령이 있었던 그날 오후, 군인들은 3대로 나뉘어 행동하게 되고 제1대는 포도청을 습격해 수감 되어 있던 군인 동료를 구출한 후 죄수들을 풀어주고 풀어준 죄수들도 가담하게 되면서 더욱 커진 세력은 민씨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습격하고 파괴하고 민겸호는 내시 분장으로 도망치다 잡혀 처참히 살해된다. 


제 2대가 찾아간 곳은 바로 신식군대 별기군(무위영 소속) 훈련터인 하도감이었다. 
하도감 터 


1925년 일제가 동대문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묻어버린 유적지를 이후 디자인,전시시설로 공사하던 중 발견되어 서울시에서 1년 6개월 기간을 거쳐 복원을 했다. 


신식군대 별기군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하도감 터이다.



이들은 하도감의 별기군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그 외의 일본인들도 죽이게 되면서 반란을 넘어선 폭도로 변모한 구식 군대였다. 마지막 제3대는 지금의 경기도청 경기감영을 습격한다.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전임 선혜청 당상)을 목표로 갔지만 이미 도망가고 없었고 경기 감영의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을 하고 일본공사관으로 몰려가 일본공사관 인근 민가에 불을 붙이게 해 공사관으로 불이 번지게끔 했다. 

다음 날 1882년 6월 10일 사태는 더욱 확대되고 군인들뿐 아니라 한양 주변 도성민들까지 동참하면서 민란수준으로 사태는 더욱 번져갔고 그들은 민씨 정권의 최고 권력자 명성황후 제거를 위해 창덕궁으로 난입하나 명성황후는 이미 궁궐을 빠져나간 후였다.  


고종은 결국 흥선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의 사태 수습을 부탁한다. 그렇게 고종은 사실상 정권을 내주었고 홍선대원군은 10년 만에 다시 정치정면에 나서게 된다. 


성난 구식 군인들을 계속해서 명성황후를 찾았고 이를 가라앉힐 방법을 찾던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명성황후의 옷으로 장례를 강행한다.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식화한다. 살아있더라도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던 것이다. 


그래고 복귀한 그 기간 동안 고종이 추진했던 개화정책들을 다시 되돌려놓는다. 그러나 대원군의 집권은 고작 33일 동안이었다.

청과 일본의 개입 

한편 임오군란으로 벌어진 일본인들의 죽음을 알게된 일본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고 일본군 약 1500명이 조선에 상륙한다. 이에 청나라 역시 폭동 군인 집압을 명분으로 약 3000명의 군인이 조선으로 들어온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 진영을 방문하지만 그대로 청나라로 납치가 된다. 


청나라가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이유는 일본에 대한 견제 및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목적이 있었다.

그 후 장례까지 치렀던 명성황후는 청을 등에 업고 다시 궁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명성황후와 고종은 정권을 다시 잡게된다. 흥선대원군이 3년간 청나라에 잡혀있는 동안 고종의 개화정책을 또 다시 되돌리고 흥선대원군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대원이 세워 놓은 화친을 배척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전국의 척화비를 제거하도록 명령한다. 3년 뒤에 흥선대원군이 돌아오지만 고종이 감금시킨다. 아들인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모신다는 뜻의 '대원군존봉의절'을 제정하는데 겉으로는 아버지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금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자객의 침입 등 감금상태에서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며느리와 흥선대원군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오군란의 결과 

임오군란의 이런 과정으로 인해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청 상인의 조선 내륙 무역을 허용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과도 배상금 지불과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한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관련 내용▼


석파정 속 세도정치(순조~철종)/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되다.(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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