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5회]
오늘의 탐사지: 운현궁
주제: 흥선대원군과 고종
운현궁
사적 제257호
운현궁은 고종이 왕이 되기 전 태어나서 12세까지 생활하던 곳으로 원래는 상당히 규모가 컸다고 한다.
운현궁 주소: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
매일 09:00 - 19:00
(입장마감 18시30분, 4월초~10월말)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이 태어나서 왕이 되기 전까지 살던 곳
또한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하는 배경이 된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운현궁에 남아있는 건물은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이다.
이로당
이로당은 두 이 늙을 로 = 두 노인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 두 분이 같이 지냈던 개인적인 공간
운현궁의 이로당과 노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노락당
노락당 안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노락당을 이용했다.
아들이 왕이 되어서 즐겁다 라는 의미도 내포된 노락당,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장소
운현궁
1866년 고종3년 3월 21일 고종과 명성황의 가례가 운현궁에서 이루어졌다. 현재도 1년에 봄(4월) 가을 (10월) 2번씩 거행되고 있는 가례행사는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결혼식(가례)를 치른 곳.
왕실의 큰 행사를 일반 사가에서 치를 만큼 당시 흥선 대원군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 운현궁이었다.
고종에게 다른 약혼자가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이되기 전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병문이라는 사람의 딸과 정혼을 했는데 그 상황에서 고종이 왕이 되자 신정왕후와 결탁하고 일방적으로 약혼 파기 선언한다. 그리고 새 며느리로 간택한 사람이 여흥 민씨의 명성황후를 선택한 것이다.
명성황후를 선택한 이유는
숙종의 부인 인현 왕후의 후손이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몰락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외가 친척이 없었고 홀어머니에 혈혈단신이었던 명성황후였다. 그래서 외척에 휘둘릴 염려가 없다고 생각해 흥선대원군의 마음에 들어서 중전으로 들이게 된다.
명성황후
16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보당 이씨로 궁녀에게 푹 빠져있었던 당시 고종은 영보당 이씨만 찾고 명성 황후를 멀리했었다. 그리고 영보당 이씨는 아들까지 낳게 된다.
명성황후보다 먼저 아들(완화군)을 낳아버린 상황에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던 중 다행히 아이를 임신한 명성황후는 아들을 낳지만 첫 아이뿐만 아니라 둘째 아이까지 연이어 사망한다.
영보당 이씨의 아들 완화군도 사망했는데 환현이 기록한 <매천야록>에 따르면 완화군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아이의 사망 이후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급격히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고종 또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아버지가 왕 노릇을 하니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늘어가는 가운데 아버지가 미운 고종과 시아버지가 미운 명성 황후는 공통의 적(흥성대원군)을 두고 손을 잡는다.
노안당
대원군이 각종 정책에 대해 논의 하던 사랑채
마지막 장소 노안당이다. 각종 개혁과 인사 정책에 대해 논의하던 운현궁의 사랑채이다.
어른을 공경하고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노안당
노안당의 뜻은 어른을 공경하고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노' 자는 대원군을 의미한다
운현궁의 건물에는 유독 "늙을 로" 가 많이 있는데 대원군은 늙음을 부정하거 한탄하지 않고 존경받는 연장자로써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3부 계속
☞석파정 속 세도정치(순조~철종)/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되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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