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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화성 3.1운동 만세길/차병혁 생가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1회]

by 365 ^^ 2020. 9. 20.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1회 2부]


오늘의 탐사지: 경기도 화성 

주제: 경기도 화성 만세 시위 운동
출연자: 설민석 




차병혁 생가 


화성의 독립운동가 중 차병혁 생가는 장안과 우정 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차병혁이 만세운동 당시에 살았던 곳으로 화성 지역 독립운동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화성 3.1운동 만세길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31km  코스로 이루어진 화성 3.1운동 만세길이 조성되어 있다. 


차병혁. 백낙열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와 화수리 주재소 터,옛 장안면사무소 터 등 다양한 항쟁지를 하나의 길로 연결해 격렬했던 만세의 울림을 느끼도록 만든 길이 화성 3.1운동 만세길이다. 



화성 만세 운동
화성 만세 운동이 출발은 송산지역에서 시작해서 향남, 팔탄면, 우정읍, 장안지역으로 만세운동이 번져나간다. 


경기도 화성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진 이유 

바다랑 인접해 있던 경기 화성은 다양한 해산물이 나고 땅도 비옥해 농지에서는 쌀과 보리같은 농산물이 생산이 되기 때문에 일제에 수탈 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해안이라 간척사업 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어서 일제에 의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어민들에겐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을 잃게 되었는데도 생계를 위협하는 일인 간척사업에 동원 된 것도 모자라 가혹한 노동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쌓였고 그때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화성 만세 시위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이다. 


경기도 중에서도 화성에서 불 같은 시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종교 지도자의 영향과 집성촌 지역으로 인해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101년 전 1919년 3월 26일 독립운동가 홍면옥은 신문을 보는데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발견하고 사람들을 모아 송산면사무소 앞에서 200여 명이 운집해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26일 오후 5시 였고 밤 11시까지 쉬지 않을 만큼 독립의지는 간절했고 점점 규모를 늘리기 시작해 사람이 가장 많은 3월 28일 사강 장터에서 남녀노소 다 모이기 시작해서 결국 1천여 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자 일본 순사 노구치는 총으로 홍면옥을 쏘고 결국 총을 맞고 쓰러진 홍면옥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은 노구치를 쫓기 시작해 돌과 몽둥이로 때려 그 자리에서 죽게된다.  



이어 옆 동네인 향남 팔탄면 발안 장터에서도 3월 31일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1천여명이 참여하게 되고 4월 1일 봉화로 대규모 만세운동의 신호탄에 불을 붙이고 그 불빛을 보고 밤에 화성주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화성 만세운동의 주동자 홍면옥은 다행히 죽지 않았으나 일본에 붙잡혀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 당시 일본 순사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4월 3일 장안면에서 쌍봉산에 이르러 천여 명이 모였고 우정면에 도착했을 때는 무려 2천여 명에 육박했고 성난 주민들은 일제의 상징인 우정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그들을 괴롭 힌 순사들이 있던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도 불태웠다. 

당시 불타버린 화수리 주재소 위에 세워진 화수 초등학교



당시 주제소에 있던 가와바타 일본 순사가 있었고 나이 25살의 젊은 순사였지만 주민들을 상대로 악행을 일삼기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었기에 순사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주민들을 보더니 가와바타가 총을 쏘기 시작한다.  가와바타의 총에 3명이 쓰러지자 분노한 주민들은 가와바타를 처단한다. 


이에 일제는 이것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화성일대에 군대를 파견한다. 수차례에 걸쳐 완전 무장한 소대병력을 투입하고 오자마자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구타하고 학살한다. 그들의 방화로 수촌리의 경우 42채 겨옥 중 38채가 잿더미가 되었고 화수리의 경우 집 19채가 소실되었다. 


당시 화수리 구장 (지금의 이장) 송찬호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군에 의해 72군데를 난도질을 당한다. 그야말로 감정적으로 자행된 보복성 진압이었다. 4월 23일 조선헌병대 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검거반이 체포한 조선인이 803명 훈방 조치한 조선인이 1202명으로 정작 이 수치도 헌병대에 의해 축소된 수치였다.  


51회 3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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