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1회 2부]
오늘의 탐사지: 경기도 화성
주제: 경기도 화성 만세 시위 운동
출연자: 설민석
차병혁. 백낙열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와 화수리 주재소 터,옛 장안면사무소 터 등 다양한 항쟁지를 하나의 길로 연결해 격렬했던 만세의 울림을 느끼도록 만든 길이 화성 3.1운동 만세길이다.
바다랑 인접해 있던 경기 화성은 다양한 해산물이 나고 땅도 비옥해 농지에서는 쌀과 보리같은 농산물이 생산이 되기 때문에 일제에 수탈 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해안이라 간척사업 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어서 일제에 의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어민들에겐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을 잃게 되었는데도 생계를 위협하는 일인 간척사업에 동원 된 것도 모자라 가혹한 노동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쌓였고 그때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화성 만세 시위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이다.
충격적인 기사를 발견하고 사람들을 모아 송산면사무소 앞에서 200여 명이 운집해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26일 오후 5시 였고 밤 11시까지 쉬지 않을 만큼 독립의지는 간절했고 점점 규모를 늘리기 시작해 사람이 가장 많은 3월 28일 사강 장터에서 남녀노소 다 모이기 시작해서 결국 1천여 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자 일본 순사 노구치는 총으로 홍면옥을 쏘고 결국 총을 맞고 쓰러진 홍면옥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은 노구치를 쫓기 시작해 돌과 몽둥이로 때려 그 자리에서 죽게된다.
당시 불타버린 화수리 주재소 위에 세워진 화수 초등학교
당시 화수리 구장 (지금의 이장) 송찬호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군에 의해 72군데를 난도질을 당한다. 그야말로 감정적으로 자행된 보복성 진압이었다. 4월 23일 조선헌병대 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검거반이 체포한 조선인이 803명 훈방 조치한 조선인이 1202명으로 정작 이 수치도 헌병대에 의해 축소된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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