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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1운동 배경 및 의의, 삼일운동 장소 탑골공원

by 짱신나^^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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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7회]

 

오늘의 탐사지: 안국역-보성사터  -천도교중앙대교당 -탑골공원

주제: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

 

* 3.1 운동과 관련된 장소: 보신각, 탑골공원, 계동 중앙고등학교 등등 이 있다. 3.1 운동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전국에서 발생하였고 심지어 기생들도 참여하는 등 온 민족이 참여했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대한민국 유일무이의 독립운동으로 당시 한번도 인구가 약 2천만명으로 추정하는데 2백만명이 참여한 운동이니 한가족당 한명씩은 다 참여한 거족적 민족 운동이다. 

 

3.1운동의 배경 

 

 


무단정치 
조선 태형령- 일본은 가혹하게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형벌 . 일제의 무단 통치를 상징하는 형벌로 당시 조선인들은 분노가 싸여 가고 있었다. 

 

고종의 서거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 하면서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 설까지 퍼져 더욱 민심은 분노했다.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

 

그 때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였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동맹국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 주의를 제창한다. 

 

 

 

2.8 독립선언 

 

이것은 한 줄기 희망 같았던 상황에 독립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그때 도코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 운동을 펼쳤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1운동
종교인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3.1운동을 준비했다.  

 

민족 대표 33인이 전원 종교인이였다. WHY?  
일제 강점기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었는데 종교 단체 모임은 자유로워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종교 단체가 나서게 된 것이다. 학생들 역시 학교에서 합법적 모임이 가능했고 조직적 활동이 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두 단체 각각 삼일 운동을 준비하다가 8일전 2월 22일에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삼일 운동 8일전에 학생과 민족 대표 33인이 뭉치게 되었다.  


 

안국역  (안국역 4번출구)  

안국역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최초 독립 운동 테마역   


선언문 만들기

 

헌법 전문이란?  헌법 만들 당시의 역사적 과정과 목적 등을 규정한 문장

 

 


헌법 전문이 9번 개정될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은 말이 삼일 운동이다. 

 

 


많은 정권의 변화와 개헌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계승되어 온 것이 삼일 운동 정신이다. 

 

5대 국경일 
 
10.9일 한글날 
8.15일 광복절
10.3일 개천절
7.17일 제헌절
  3.1일 삼일절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결졍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민중 정신의 승리



삼일 운동을 3월1일에 거행한 이유

 

고종 황제의 서거 이후 3월 3일 국장일이 결정되었다. 그날 서울에 많은 인파들이 모일 것을 예측하고 3월3일로 내정했던 거사일을 천도교에서 국장을 택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반대하고 3월 2일로 변경했으나 기독교 측에서 일요일(기독교의 안식일)이라 반대하며 모든 의견을 수렴해서 3.1일로 결정했다. 

 

기미 독립 선언문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만큼 기미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제출 할 조선 독립에 관한 통고서도 작성 그리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 강화 회의의 각국 위원에게 제출할 의견서 초안까지 전부 최남선에 의해 쓰여졌다.

 



 

 

기미 독립 선언서는 거서날을 알고 쓴 것이 아니라 일단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독립 선언서의 완성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대략 2월15일 경 독립 선언서 본문이 완성, 2월 26일 경 종교계 합의 후 명단까지 완성된 것으로 추정 ,거사 당일로부터 불과 3일전에 완성된 것이 기미 독립 선언서다. 

 

독립 선언서 초안

독립 선언서 초안을 쓰기 위해 당시 일본인이 경영했던 극장 우미관 영화 전단지를 가져다가 그 전단지에 낙서처럼 날려 쓴 것이 초안이다. 일제의 의심을 피해 몰래 연습했던 것이다. 독립 선언서의 맨 처음 작성된 곳이 일본인의 집이었고 일본인 소년에 의해서 독립 선언서는 전달되었다. 
 일본 유학에서 최남선과 함께 귀국했던 독립운동가 임규의 아내가 일본인이였다. 임규부부의 집을 찾은 최남선은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일본인이 거주하는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그 일본인 아내의 아들이 독립선언서를 전달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인쇄한 곳

 

  

보성사는 그 당시 천도교에서 보성 중학교를 설립하면서 만든 보성 학교 내에 있던 교내 인쇄소였다. 

 

 

최남선이 경영하던 인쇄소 신문관에서는 인쇄판을 만들고 이곳 보성사에서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인쇄했다.당시 기미 독립 선언서 인쇄를 담당했던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천도교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제국신문을 창간한 사람이 바로 이종일 (순한글로 쓰였던 제국신문)이다. 한자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반 대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신문이었다. 이종일은 제국 신문을 통해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다.

 



 


독립 선언서 인쇄 과정

D-2일 2월27일 밤 기미 독립 선언서 인쇄를 시작한다. 늦은 밤 비밀리에 진행된 작업이었고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이종일은 위장을 하기 위해 자신의 성주 이씨 족보를 인쇄하는 것으로 위장하려고 그전부터 전국에 있는 문중에 다 알렸다. 불빛을 낯추고 인쇄를 하는데  조선인 경찰인 (일본의 앞잡이) '신철'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고 그대로 보성사를 급습한다. 기미 독립 선언서를 본 신철을 회유하기 위해 오늘날 돈으로 4억 원 추정되는 돈을 쥐어주고 넘어갔다. 

 

그 후 안전한 곳에 숨겼다고 다음 날 아침부터 배포할 계획이었지만 파출소를 지나야 했다. 많은 양의 인쇄본을 옮기려니 수상해 보일 것을 예상하고 기미 독립 선언서 위에 성주 이씨 족보를 덮어서 위장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잡힌다.수색을 하려고 족보 책을 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갑자기 정전이 된다. 덕분에 무사히 거사를 치를 수 있었다. 

 

배포 

 

D-1일 2월 28일 아침 천도교 중앙 대교당 근처였던 이종일 선생의 본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독립 선언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종교 대표들이 배포 후 전국으로 비밀스럽게 배포가 이루어지는데 전국 7개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했고 뿐만 아니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도 발송이 되었으며 러.프.영 대사관에 보내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고 심지어 일본 총리에게도 보낸다. 

 



 

 

이종일 선생의 죽음       이종일은 삼일 운동 이후 악질적인 항일 운동자로 낙인 찍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제 2의 3.1운동을 준비하다 발각이 되어 계획이 무산된 이후 더욱 심해진 통제와 감시 속에 건강도 나빠져 안타깝게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후 1962년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삼일운동의 시작점 

 

 

 

탑골 공원의 뜻 (=탑골 공원이라 부르는 이유)

수양 대군 세조는 말년에 온갖 악재에 시달리다 불교에 의지하며 원각사라는 절을 만든다. 이 곳에는 원각 사지 10층 석탑이 있다고 해서 탑골 공원이라 부른다.

 


D-0 당일 2시 탑골 공원 안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민중을 동원하는 일을 학생들이 도맡아서 했다. 그때 한 청년이 기미 독립 선언서를 들고 팔각정에서 낭독하기 시작한다. 군중의 수는 5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일본은 만세 시위를 가볍게 생각해 선동한 몇몇 사람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134명을 체포하고 만세 시위가 잠잠해 질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위 행렬은 밤 12시를 넘긴 시간까지 이어지고 삼일 만세 운동은 수개월 간 지속된다. 

 



그동안 쌓인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염원이 기폭제가 되어 7개 도시에서 시작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진 만세 운동은 1600건 이상이 되고 국내 뿐만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하와이,필라델피아) 퍼진다. 

 

 

 


삼일 운동의 의의
세계에 조국 독립의 의지와 정당성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속된 평화적인 만세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하고 일제의 폭력 진압으로 1000여 명이 사망, 16,000여 명이 부상 무려 46,000명이 검거된다.

 

기생들의 만세 시위로 알려진 이 사진은 일본의 여학생들이 했던 '히사시가미'로 머리모양 (일본 여배우가 유행시킨 머리 스타일로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여서 조선인 학생들이 많이 따라했다고 한다.) 으로 인해 기생들의 시위로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 이 사진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사진이다.


그러나 삼일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일제의 잔혹한 탄압 방식이 아닌 통치 방식 자체를 문화 통치로 바꾼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의는 삼일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및 의열단의 청산리, 봉오동 대첩등의 1919년 이후에 수많은 독립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3.1운동이었다. 

 


삼일 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사람

 

처음에 우리나라 땅을 밟을 때는 금광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금광 사업을 위해 미국을 떠나 20살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입국 후 가정을 꾸려 서울에 정착 하게 된다. 아내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 아들의 출생은 3.1운동 하루 전날이었다.

 

그 즈음에 병원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느낀 알버트는 알고 보니 세브란스 병원에도 독립 선언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3.1운동을 꼭 알려야겠다는 생각한다. 문제는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미국인에게 통제와 감시가 약했기 때문에 이를 숨기고 있다가 동생인 윌리엄 테일러에게 전달 후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암리 학살사건과 3.1운동 과정을 전 세계에 보도 했던 기사였기 때문에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너무 사랑한 그는 1948년 사망한 앨버트는  유언으로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남겼고 그의 바람대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치했다. 

 

3.1 운동 관련 내용 ▼

☞고주리 제암리 학살 사건 in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화성 3.1운동 만세길/차병혁 생가

 

 서대문 형무소와 유관순 열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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