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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국립항공박물관 (김종림 김신 안창남 안수산 노백린)

by 짱신나^^ 202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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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1회]


오늘의 탐사지: 국립항공박물관

주제: 광복 75년
출연자: 설민석 



국립항공박물관 

2020년 7월5일에 개관한 국립항공박물관


1920년 7월5일에 개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비행학교 개교일과 맞춰 7월5일 개관한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이곳 항공 역사관에는 우리나라 항공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항공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한인비행학교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6인의 항공독립운동가 동상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에 성공한 뒤 세계 여러 나라가 비행기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해 비행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건 세계 제1차 대전(1914년~1918년) 그 4년 동안 비행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전쟁 무기로써 비행기가 할 수 있는 정찰 업무를 하던 중 정찰기를 타고 적의 동태를 살피다 적을 만나게 되고 최초의 공중전이 권총으로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1인용으로 비행기 조종과 사격을 같이 한 것이다. 그 다음 공중전에 이기기 위해 장총을 들고 비행을 하다가 결국 전투기가 탄생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는 1920년을 조국 독립 전쟁의 해로 선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쟁에 필요한 돈이나 군인, 무기등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열악했던 상황속에 전면전은 힘들었으므로 특별한 방법으로 적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전력이 필요했고 그것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당시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 안창호 선생은 무조건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한인 독립 운동의 아버지 
도산 안창호

안창호 선생의 태생은 평안남도의 평범한 도롱섬 소년이었다. 많은 고생을 하시다 24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미국행을 결심한 계기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 당시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미국에서 교육을 배울 것을 결심한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결혼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미국에서 집이나 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 보이로 취직하며 돈을 모은다.  그러던 중 미국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기회가 생긴다. 


1902년 12월 7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실린 한국의 문화와 도산 안창호 선생 인터뷰



"나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교사가 장래 희망이다. 내가 여기서 보고 배운 모든 걸 한국으로 가져갈 순 없겠지만 1000가지 중 단 하나 만이라도 보석과 같은 핵심을 얻고 싶다. "




당시 24세의 조선의 엘리트 청년이었지만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처음부터 배우길 원했던 안창호는 초등 교육부터 시작하려고 결심하고 미국의 초등학교를 찾아가 입학 허가를 부탁하지만 몇 번의 퇴짜를 맞다가 결국 그의 열정과 끈기에 감동한 교장 선생님이 입학을 허락하게 된다. 

24세의 청년은 미국 초등학생들과 함께 교실에 앉아 기초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미국 한인 독립 운동의 아버지가 된 도산 안창호이다. 






그 후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독립 운동을 하려 했는데 1910년 조선은 강제 병합되고 그래서 일단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중국 칭다오에 갔다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미국에 다시 도착 후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청년 단체 '흥사단'을 창립 후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한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다. 임시정부에서 그는 내무 총장,노동 총장 일을 하면서 비행기가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에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인 노백린 장군은 전투기 도입과 파일럿 양성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거기서 이미 한인 청년들이 전투기 비행술을 익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청년 혈성단 결성과 
한인 비행 학교의 탄생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이끈 리더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임시정부로 향하면서 미국을 떠나게 되고 그 후 미국에 남아있는 독립 운동하던 청년들이 만든 단체가 '청년혈성단'이다.  

창단 맴버가 23명이었고 독립을 위해 뭘 할지 고민 중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민간학교 레드우드에서 힘겹게 훈련을 하고 있던 '청년혈성단'을 만난 사람이 노백린 장군이다. 



그 후 파일럿이 있으니 자금만 있으면 비행 학교 설립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한인 비행 학교이다. 이들이 만든 학교는 공군의 시초가 되었다.  





한인비행학교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재미 동포 백만장자 김종림  


김종림은 한인 비행학교 건립에 앞장서고 엄청난 돈을 지원해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게 된다.그때 비행기를 사고, 비행장 부지도 매입 및 건물도 마련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종림이다. 

원래는 철도 노동자였으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었던 김종림은 1914년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이를 기회로 유럽에 군량미를 수출해 큰 부자가 된 김종림은 그렇게 번 돈으로 고아원 설립 및 임시정부 지원, 한글학교 창설, 유학 비용 지원 등으로 환원한다.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백미 대왕'이었다. 

1920년대에는 미국인들도 비행기가 신기한 때였는데 한인이 비행 학교를 설립한다고 해서 미국에서 기사화 되었다. 

윌로우스는 미국의 지명


한국인들이 비행장 터를 마련 했다는 내용.
미국의 지역지에서도 주목할 만큼 인상 깊었던 한인들의 비행 학교 설립.



비행 학교 폐교 이유


백미대왕 김종림에게 대홍수가 덮치면서 자연 재해로 인한 어려움이 닥치면서 결국 재정 지원이 끊기게 된 한인 비행학교는 1921년 4월 개교 1년 만에 폐교가 된다. 







의의

불과 1년 만에 수많은 조종사를 배출후 실제로 항일전에 투입이 되어 중국군과 연합해 파일럿으로 하늘의 독립군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한인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다.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비행사의 꿈을 키운 16세 소년 안창남은 1917년에 서울 용산에서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본다. 조선 하늘에서 펼쳐진 비행쇼에 매료된 16세 소년 안창남은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1년 일본에 건너간 안창남은 민간 비행사 시험을 본다. 당시 일본에서도 따기 힘들었던 비행사 면허였는데 거기서 2등 비행사 자격증 취득을 한다. 그리고 이듬해에 바로 2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해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1922년 고국에서 안창남의 고국 방문기념 비행이 성사되고 조선으로 금의 환향한 안창남은 사상 최초 조선인으로서 5만 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여의도를 지나 남산, 창덕궁 등 한반도 상공 비행한다. 



식민치하에 갖혀 산 우리민족에게 희망과 자긍심을 일으켜준 안창남의 비행이었다. 그 후 안창남은 중국으로 망명 후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계기가 이 비행 때문이었다. 



안창남의 비행기


일본에서 분리된 상태로 우리나라로 갖고 와 직접 재 조립한 비행기 제작 기술도 마스터한 안창남이었다.  



1923년 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에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다.


진도 7.9 수도권 전체가 초토화 된 일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자경단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관동대학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군으로 항일전쟁에 참전하고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며 안창남의 뒤를 따른 수명의 조선인 비행사들을 만들어내고 독립군을 위해 상당한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하셨는데  비행학교에서 교육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추락사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9세 였다. 









안수산 여사
(안창호의 장녀)


미 해군을 최초로 입대한 아시아계 미국인이자 여성 최초 포격술 장교였던 안수산 여사는 처음에는 키작고 아시아계 여성이라 입학 거절을 했으나 그 후 다시 지원 마침내 여성 최초 포격술 장교가 됐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입대였다. 그 후 태평양 전쟁의 승리에 암호해독가로 큰 기여를 했을 정도로 유능한 분이다.  





김신 
(김구의 둘째 아들)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 김신은 조종사가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난징 하늘이 일본의 폭격기로 가득하고 난징 폭격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일본에 되갚아 줘야겠다고 생각 조종사를 꿈꾼 김신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 지원으로 조종사가 된다. 







그 후 1944년 미국으로 건너가 진보 된 조종술을 배우는 중에 6.25가 발발 당시 남한은 전차는 물론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1950년 6.25 다음날 6.월 26일 조종사를 모아서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으로부터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할 10인의 조종사로 뽑힌 김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5일 동안 전투기 훈련을 받는다.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 투입

이후 전쟁에 바로 투입되어 북한군의 중요한 보급로가 되는 평양 대동강 지류에 위치한 승호리 철교를 끊는 작전에 투입된다. 


북한군은 승호리 철교를 강하게 방어하고 미국의 전폭기가 약 500회 이상 출격에도 작전 실패하고 북한군의 거침없는 공격에 미군은 작전 실패를 하고 


이때 김신이 출정해 대공포 사이를 피해 비행하며 드디어 승호리 철교를 폭파한다.


성공을 위해 위험하고 공격적인 작전을 진행한 것이다. 그 가운데 김신이 있었다.


훗날 공군 참모총장까지 역임한 김구 아들 김신이다. 




국립항공박물관 위치 



운영시간


화요일~일요일

10:00~18:00 (입장마감 17:00)


※휴관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월요일 당일 개관 후 다음날 평일이 휴관)


관람료

전시관람 : 무료

체험교육 : 유료


국립 항공 박물관 홈페이지

 http://aviation.or.kr/index.do


예약하러 가기

 http://www.maketicket.co.kr/ticket/GD15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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