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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고종 가계도/대한제국 후손의 마지막 모습들(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이구)

by 365 ^^ 2020. 9. 27.

[선을 넘는 녀석들 4회]

 

오늘의 탐사지: 일본 도쿄

주제: 대한제국의 마지막
출연자: 설민석, 문근영

 

 

대한 제국의 마지막 모습들

 

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서도 고종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품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에 즉위한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강제로 퇴위된다. 1905년 을사늑약인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고종은 이를 무효화 하기 위해  열강들이 참석한 네덜란드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곳인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1907년)한다. 

헤이그 특사

 

그러나 회의에 참석도 못한 채 외면당하고 대한제국이 외교사절을 파견하자 성난 일본은 그때 친일파 송병준이 일왕에게 가서 사과를 하든가 고종 황제에게 자결하라고 한다.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고종 황제를 협박한다. 일본의 만행에 앞장 선 역적들의 거듭된 폭언과 협박에 결국 1907년 강제 퇴위가 된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에게 양위를 하는 양위식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했다. 어쨌든 순종이 황위에 올랐는데 후사가 없으니 세제(형제) 책봉을 한다. 그것이 고종의 7번재 아들 영친왕이다.

 

영친왕(순헌황귀비의 아들)

 

영민했던 고종의 다벗째 아들 의친왕은 황족 중 유일하게 항일 투쟁에 적극 참여한 사람이였다.

 

의친왕(귀인 장씨의 아들)

 

일본이 판단했을 때 똑똑하고 영민한 의친왕을 견제하며 어린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고종 가계도
고종 가계도

 

고종은 9남 4녀를 두었으나 성인이 된 사람은 3남 1녀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고 순종만이 어른이 되었다. 다섯째 아들은 귀인 장씨의 의친왕이고 순헌황귀비 엄씨(엄상궁으로 아관파천씨 고종을 피신시킨 인물)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와 귀인 양씨가 마지막으로 덕혜옹주를 낳아 3남 1녀만 성인이 되었다. 

 

귀인 엄비의 영친왕과 마사코(이방자여사)사이에 아들 둘이 있었으나 첫째 아들 이진은 8개월만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 이구만 성인이 됐고 이구는 미국인 줄리아 리 사이에 자식이 없고 이혼을 했다. 양자로 의친왕의 아들을 입적.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이혼했고 둘 사이에 딸 소 마사에는 자살유서를 써 놓고 실종됐다.

 

현재는 고종의 후손은 귀빈 장씨사이에 낳은 의친왕 계열들만 있다. 의친왕은 생전에 13남9녀를 남겼으나 본처 덕인당은 자식이 없고 빈,첩실 12명에서 13남 9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생존 아들로는 10남 이석(67)씨와 이갑·이환·이정씨가 있다. 이 중 이석씨만 한국에 거주하고 나머지 세 아들은 미국에 살고 있다. 

의친왕 자녀 중  둘째 아들 이우는 인물이 좋고  운현궁을 물려받게 되었고 민족의식이 있었던 인물로 유일하게 황실 후손 중 한국인과 결혼한 인물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일본 군대 입대하게 되고 1945년 8월 5일 히로시마로 파견갔다가  8월 6일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한 인물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말년은 정말 비참했다. 

 

 


영친왕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11세 때 이토 히로부미 손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간다.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1911년 일본 학습원에 중도 편입한 이은은 편입한 석달 만에 55명 중 4등을 하니 이토 히로부미가 깜짝 놀라서 우등생 이은을 편입한지 반년 만에 퇴교시키고 군사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 사관학교(군사학교)에 진학시킨다. 그곳에서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게된다. 사실상 볼모의 처지인 이름뿐인 황태자였다. 

 

영친왕 육군사관학교 졸업 사진

 

어느 날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는 아들의 일본 생활을 보게 되는데 군사훈련에 주먹밥 먹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급체를 해서 돌아가셨다고는 설이 있다. 

 

고종의 자식들은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대를 끊어야 하니 영친왕은 1949년 일본 고위 장교 중장이 되고 그 후 일본황족 마사코(=이방자)와 정략 결혼한다. 

영친왕 마사코 (=이방자) 결혼 사진
마사코 여사와 영친왕의 아들 이구

 

영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지내며 황태손인 아들 이구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광복 이후에 왕족의 지위를 뺏긴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새로운 헌법이 시행되면서 일본 왕족의 지위와 국적을 잃고 평민으로 격하된 영친왕이었다. 조국에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왕족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 이후 미국 이민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져 다시 일본행,

뇌경색으로 쓰러진 영친왕을 보살피는 이방자여사

 

그런데 1963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국적 회복을 하고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와 이복동생 덕혜옹주와 함께 56년 만에 귀국한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돼 실어증까지 걸리고 귀국 후 말 한마디를 못하고 병상에서 7년간 투병생활 끝에 고국 땅에서 잠드셨다. 

 

영친왕 장례식 행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다. 

 

 

 

영친왕의 사저

 

3남1녀 중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살았던 사저가 일본에 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살았던 곳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호텔 이름에 포함된 프린스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이 호텔 별관이 영친왕 사저였다.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 영친왕 사저

 

1930년 영친왕의 일본 거처를 위해 서양식으로 설계한 저택으로 결혼한 지 10년 후 부터 살던 저택이다. 

 

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클래식 하우스

 

일본 황족과 결혼 할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에 났던 기사 

"영친왕은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짐승이다." 
나라가 망하고 평범한 백성들은 나라 밖에서도 항일운동을 하는데 황족은 일본 여자랑 호의호식한다며 민족의 역적으로 몰리며 결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망국이 황태자 영친왕은 광복 후 작위를 뺏기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저택을 떠났고 그 후 일본 참의원 의장 관저로 쓰이다가

영친왕 사저 외관

지금은 민간기업에 팔려 카페나 연회장소로 쓰이는 구 영친왕 사저이다. 

 

클래식 하우스 현재 내부 모습

 

클래식 하우스

 
 


순종의 조카 영친왕의 아들이자 마지막 황태손

이구의 죽음

이구

 

여기 2005년에 프린스 호텔 화장실에서 돌아가셨다.

일본 프린스 호텔 신관

 

자신이 태어난 자리에 세워진 프린스 호텔 신관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프린스 호텔 신관 화장실
한국과 일본사이 외롭게 생을 마친 황태손 이구


덕혜옹주

 
덕혜옹주도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뒤 딸이 실종, 이혼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38년 만에 귀국한다. 고종이 덕혜옹주를 낳았을 때가 나이가 60세였다. 귀하디귀한 예순 둥이로 고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고명딸이었다.

고종과 덕혜옹주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종 독살설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19년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승하 친일파 윤치호가 쓴 일기에 고종황제가 식혜를 드시고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였다 다리가 너무 부어올라서 바지를 찟고 치아가 다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졌다는 독살설이 제기 된 것은 사실이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공식적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13세에 일본에 끌려간 덕혜옹주는 맨날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혹시 독이 들어있을지 모르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괴소문에 물 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던 덕혜옹주
 
영화 덕혜옹주 한 장면

 

덕혜옹주에게 일본은 아버지를 죽인 두려운 곳이었을 것이다. 4년 뒤 어머니 양 귀인 마저 돌아가시고 조현병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덕혜옹주의 딸도 유서를 써놓고 실종이 되고 일본에서 모든 걸 잃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땐 마음도 몸도 상처로 가득했고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덕혜옹주는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의 마지막 남긴 말

 

낙선재에서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비전화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덕혜옹주 마지막 필체
어린 시절 덕혜옹주 모습

 

덕혜옹주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나고 그 후에 9일 만에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마저 눈을 감는다. 하나 같이 비참하고 처참하게 비극을 맞은 대한제국 황실이었다. 


황실이 이 정도인데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그날 이후 황실도 백성도 비참했던 35년 일제강점기였다.


고종이야기 ▼

 

환구단과 돈의문에 얽힌 고종 이야기 

 

 덕수궁(정관헌,석조전,함녕전) 속 고종이 만든 대한제국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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