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비각 안에는 광성보 전투에서 순국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넋을 기린 비와 당시 순국한 군인의 충절을 기리는 49명의 명단이 있는 순절비가 있는곳이다. (용두돈대,손돌목돈대,신미순의총 아래 설명 참조)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인 이유
몽골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던 고려, 고려시대때의 수도는 개성(개경)이었다.
육지에서는 몽골을 대적하기 힘들었다. 레그니차 전투 등 유럽조차 공포로 몰았던 기마 전투력을 가진 몽골이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바다 경험이 없어 상대적으로 해상 전투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바다로 유인하려고 1232년 최우 (무신정권의 집권자)는 강화도로 수도를 몽골 침입 시 강화도로 천도 결정하고 고려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는 왕보다 군인의 힘이 더 영향력이 있었다.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인 또 다른 이유는 사방이 갯벌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배의 접근이 어려웠다.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었고 그곳에 집중해서 초소를 집중 배치를 한다. 그 초소를 바로 돈대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인조와 이를 지켜본 인조의 아들, 효종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한다. 만약 청나라를 공격했을 때 전시 상황에서 피신할수 있는 곳은 강화도였고 효종 9년(1658)에 광성보를 설치한다.
그 후 숙종때 초,소, 돈대(=침입으로부터 방어,보호 시설)를 만들기 시작해서
돈대만 54개에 이른다.
청나라등 외세가 내륙으로 침입해 올 것이라 예상하고 방어용 시설을 구축했으나 서양이 바다를 통해 침입해 올것은 예상치 못했다. 19세기에 미국, 프랑스의 예상치 못한 공격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프랑스는 중국에서 강화도로 이동 (병인양요 1866년)
미국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함대를 집결했다. (신미양요 1871년)
서양의 성들은 철통방어 으리으리하다. 반면에 조선의 성벽이 낮은 이유는 해안가 절벽 자체가 성벽이였던 셈이다.
그리고 화약 무기가 발전하면서 높은 성벽은 오히려 무너뜨리기 쉬운 타켓이 된다. 그래서 성벽이 낮아지고 두꺼워 진다.
손돌목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센 곳으로 유명)
용두돈대 (=사두돈대)
원래는 뱀의 머리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사두돈대였는데 뱀머리보다는 용머리이 낫다고 하여 조선후기 이름을 변경했다는 설이 있다.
신미양요의 원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1866년 신미양요 5년 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온다.
상선 안에는 미국인 선원과 영국인 선교사들이 있었고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파, 상인들은 통상과 무역에 목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평안 감사 박규수(<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손자)는 어릴때 부터 개화사상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아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와의 통상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나라법 때문에 손님들을 대접 후 잘 보내려고 했다. 배에 필요한 식량과 자재까지 나눠주며 호의를 베풀었더니 이들이 뭍으로 올라와 평양 군민과 충돌,민가를 약탈을 하고 조선 관리를 납치하고 심지어 대포와 총으로 민간인들을 12명을 부상 입히고 7명의 조선인이 죽었다.
완전 분노한 평안 감사는 비가 그치고 수위가 낮아진 대동강 물로 인해 셔먼호가 갯벌에 고립 된 틈을 타서
제러널 셔먼호를 불태워 버린다.
♣ 그 후로 100여 년 뒤 1968년 북한은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를 납치한 적이 있는데 제너럴 셔먼호 격침 장소 옆에 같이 전시를 하며 반미 교육장으로 활용했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그때부터 안좋아진다.
배도 불타고 선원들도 전원 사망,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호는 증발해버린다.
신미양요 (1871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관심이 생겼던 미국은 5년 뒤 1871년 5척의 미국 함대에 1230명의 병력을 태우고 나가사키에서 출항해 강화도로 향했다. 겉으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들어오면서 사실상 조선의 문호개방을 노리고 있던 미국었다.
미국은 허락도 안 받고 강화도 정찰을 하려고 1대의 배를 보냈고 우리 입장에서 다른 나라 배가 드나 들어서 방어를 위해 대포로 경고 사격을 했다. 사정거리가 짧아서 배에 닿지도 못했지만 미군은 기다렸다는 듯 협상이 들어 온다.
미국: 평화롭게 해안측량하고 있었는데 너희가 공격했다. 문호개방해라
조선: 단호히 영해 침범했으니 못해준다.
이를 구실로 미국이 공격을 개시한다. 그들은 단숨에 강화도의 초지진을 함포 사격 점령 후 상륙을 한다.
미군은 점점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광성보를 공격한다. 미국 해병들이 육지로 들어 오고 바다에서는 끊임없는 대포 공격으로 수륙 양공 작전으로 공격을 한다. 문제는 우리의 대포는 사정거리가 짧아 쏴도 닿질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조선군들이었다.
이때 이를 막을려 했던 사람이 어재연 장군이다.
어재연 장군은 수자기를 광성보에 꽂고
조선군에게 말한다.
그러나 대포 만으로도 이미 전력을 상실했던 조선군이었고 미군은 가볍게 육지에서 이를 정리하러 왔는데 죽은 줄 알았던 조선군이 일어나 싸우기 시작한다.
구한말 역사가 황현의<매천야록>에 기록된 내용이 있다.
어재연 장군이 처음에는 총을 쏘다가 탄환이 떨어지면 칼을 뽑아 적을 격살했고 칼이 부러지면 몸을 뒤져서 탄환을 얼굴에 집어던지고 흙을 뿌려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전투의 조선군 전사자는 우리측 집계로 조선군 53명 미군은 3명이 전사한다.
전투의 피해 상황만 보면 우리가 졌다고 생각 할수 있지만 미국은 엄청 놀란다.
미국측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직후라 전쟁의 선수였고 조선군은 전투경험도 없었다.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결사항전을 했던 것이다. 이런 조선군 기세에 놀란 미국은 통상수교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신미양요 최고의 격전지
손돌목 돈대
어재현 장군의 수자기를 꽃고 전사한 걸로 추정되는 곳으로
조선군들은 이 돈대 위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신미순의총
광성보 내에서 싸우다 전사한 무명의 용사들 무덤이다.
일곱 명이라서 봉분이 7개가 아니라 시신을 안장을 하려고 보니까 너무 훼손이 되었고 게다가 더운 여름이라 시신도 바로 부패해 누가 누군지를 알아볼수 없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들을 7기의 분묘에 나눠 합장을 한것이다.
신미양요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공고히 하였다.
일본은 같은 방법으로 1876년 고종 13년에 수교 요구를 해오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지만 치외법권(일본인들이 죄를 지으면 조선에서 죄를 물을수 없다) 등의 불평등한 요소가 있는 조약을 맺게 된다.
신미 양요 이후 평안도 도지사 박규수가 중국에 간다. 중국에서 서양 신문물을 접하게 되고 안경, 자명종등 발달된 기술에 놀라 귀국 후 개화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박규수에 의해 개화사상을 배운 학생들이 (김옥균 등) 개화파가 되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3일 천하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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