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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제주도 역사 (탄생설화,삼성혈,한라산)

by 365 ^^ 2020. 10. 7.


[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 2회]


오늘의 탐사지: 제주도 삼성혈-조천포구 -조천 비석거리 

주제: 제주 역사 
출연자: 설민석, 문근영



유네스코 3관왕 제주도





삼다도 제주
여자 돌 바람이 많은 이유 

▶섬이다 보니 출항을 나가서 남자들이 잦은 사고로 남자 인구가 줄어들어 여자가 많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제주도라 돌이 많다. 용암이 식으면서 생겨난 현무암이 많다.  
▶바람이 많은 이유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기상변화에 쉽게 노출되는 위치로 오호츠크해 기단와 북태평양 기단이 만나서 남쪽 북쪽으로 아래 위로 이동이 잦아 바람이 많이 일어난다.  


제주도 기후 

한라산이 북서 계절풍을 막아 서귀포시가 제주시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시베리아 기단의 찬 바람이 한라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푄현상) 온도가 1도씩 올라가기 때문이다. 
 
제주 돌담이 낮은 이유 


제주도의 돌담은 높지 않다. 이유는 출입을 막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집과 집 사이의 경계 표시를 하는 목적이 크기 때문이다. 




제주 역사 


우리 역사에서 제주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 <삼국사기> 이다.



삼국시대에는 사신 왕래, 교역 등 백제, 신라와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다가 신라 전성기에 독립국가로 인정했으며 당시 명칭은 탐라였다. (섬  나라 =섬나라)


조선 시대에는 태종 이방원의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지배력이 강화된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를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했다. 전라도의 제주 목으로 지정한다. (목은 지금의 '군'정도) 

유배, 지방관 임명시 육지인들에게는 기피대상으로 제주살이는 힘든 곳이었다. 


제주도 탄생 설화 

설문대 할망과 제주도 탄생 설화 
옛날 옛적에 옥황상제의 셋째 달이 있었는데 힘이 넘치는 분으로 인간 세상을 구경하다가 하늘과 땅을 나눠버렸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땅으로 추방되고  흙을 나르다가 흙이 떨어진 곳이 제주도이고 흙이 많이 떨어진 곳은 한라산인데 뽀족하던 산을 툭 치니 백록담이 되었다. 

012

설화속에서도 여자의 힘이 세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제주에서 섬기는 신은 1만 8천개 정도로 토양과 풍랑 등으로 생활 터전이 척박했던 환경 탓에 여러 신에 의지하게 된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하정우 역 강림은


제주 신화에서 한 고을의 포졸이었던 강림 도령은 원님의 고민을 풀어주고자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이승와서 고민을 해결해줬고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데리고 오는 일을 할 것을 제의하고 그렇게 강림 도령은 저승차사가 된다. 실제로 제주 민속 신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민호 작가가 밝힌 바 있다. 




제주도 건국신화의 본거지
삼성혈


세 개의 구멍에서 솟아오른 잘 생긴 세 남자의 이름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였다.


그들이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이다. 그때는 제주도에는 가축도, 곡식도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다. 그때 외지에서 배 한 척이 왔는데 그 배안에는 여자 세 명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결혼을 하고 이후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활을 쏴 꽂힌 곳 첫번째 장소를 일도 그 다음은 이도 ...삼도 그렇게 탄생한 곳일 제주시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다. 



일반적인 시조의 탄생지는 알인데 제주 신화는 땅에서 탄생한 설화로 제주도가 유일하다. 

삼성혈 주변의 나무들이 삼성혈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세 시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듯한 ...


외지의 여자가 가축과 곡식을 가지고 왔고 그들과 결혼한다는 것은 외지 문화와 토착 문화가 만나서 문명을 이룸으로 해석된다.(설 쌤 해석)

제주의 말

제주 방언은 센 발음들이 많은데 고구마를 감자 , 감자를 지슬이라고 한다. (지슬의 본딧말은 지실: 땅의 열매). 시간이 지나면서 지실-> 지슬로 변형됐다.  할머니 포함 성별 불문 나이 많은 사람=삼촌이라고 부른다. 모두 친척처럼 지내는 괸당문화 이웃을 다 삼촌이라 부른다. 



제주 2대 포구 중 하나
조천포구 

조선 후기 화북포구와 조천포구가 2대 포구였다. 


육지와의 거리가 80km 거리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조선 후기 배를 대기 어려운 지형적 특성상 육지와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연북정 


당시 관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 과거시험은 3년에 1번 33명만 뽑았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방관리들의 선호지역은 내륙 지방이었다. 제주도로 발령나면 좌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관리들이 이곳에 올라 북쪽을 보면서 그리워했다는 정자 연북정이다. 



유배지 제주도 

옛날 제주도는 야만의 섬이라 불렸는데 추사 김정희(8년3개월 유배)의 말에 따르면 먹을 것이 너무 없어 한양에서 먹을 것을 보내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 만큼 힘들었던 제주도 유배생활이었다.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 중 대표적으로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과 인조 아들 소현세자 아들들, 항일지사 최익현,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있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출륙 금지령을 내려 제주도민들은 200년 동안 제주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정부로의 공물 공급이 끊길 것을 우려한 정책이었다. 

1601년 어사로서 제주도로 파견된 <남한산성>김상헌의 기록에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비참했던 생활상을 기록 특산품 등 관리들의 수탈로 더 생계가 어려웠고 이와 더불어 육지로 나갈 수도 없어 어려움을 알릴 길도 없었던 조선시대 가장 힘들었던 제주도민의 유배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300년 김만덕이 처음 육지로 나간 사람이다. 


정조 때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던 제주도에 당시 유통업의 큰 손이었던 만덕은 쌀 500섬 기부 해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간 것이 최초로 제주도를 나간 인물이다. 



조천 비석 거리 


비석이 많은 이유는 비석의 위치는 포구가 있는 곳으로 서울에서 오는 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포구에 배치를 한것이다.

제주도로 새로 온 지방관들이 비석을 보면서 선배들의 업적을 보면서 올바른 정치를 펼치라는 뜻에서 만들었다.


비석치기 유래 

19세기에 세워진 비석들 그 당시는 민란의 시대였다. 태평하게 자신의 업적 기리는 비석을 세우려던 관리들에 분노한 시민들은 비석에 돌을 던졌던 것이 오늘날 비석치기의 유래가 된다.



한라산 

한라산은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1947m)으로 한라산이 바다까지 닿아 있으므로 제주 도민들은 한라산을 일컫어 한라산은 제주도이고 제주가 곧 한라산이다라고 하며 섬과 산은 하나다.  



한라산의 다양한 식생 

2차 초지대: 사람이 만든 식생


2차 초지대가 생긴 이유는 고려시대 원나라에 80년 정도 간섭을 받던 시절에 말을 타던 유목 민족 몽골은 말 160필을 가지고 제주도에 들어온다. 


제주 목장에서 말을 사육하던 몽골인들을 목호라 불렀고 말을 키우기 위해 한라산 200M~600M 사이에 불을 질러 초원지대를 확보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몽골인들이 본국으로 말을 실어갔는데 현재 올레길 중 9코스가 제주 말로 '말길' '몰질'이라고 한다. 


목호들의 제주도 정착 
또한 제주에 파견된 몽골인 목호는 제주인들과 결혼해 현지에 정착했는데


원 간섭기가 끝나가던 고려말 목호의 난으로 최영 장군이 목호를 토벌하러 왔을때 


오히려 제주 도민들은 목호편이었다. 수탈을 하다하다 남편까지 빼앗아 가려 했던 고려였기에 육지로 다 내주어야 했던 제주도만의 아픈 역사이다. 




☞제주 4.3 사건의 학살터 제주 정방폭포, 영모원


진짜 토종 흑돼지를 먹고 싶다면 제주 연리지 가든(늘푸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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