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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제주 4.3 사건의 학살터 제주 정방폭포, 영모원

by 짱신나^^ 2020.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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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 2회]

 

오늘의 탐사지: 제주 정방폭포

주제: 제주 4.3 사건 

출연자: 설민석,문근영

 

 

제주4.3사건의 학살터
정방폭포
 
정방폭포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

 

약 70년 전에는 이곳에 수용소로 쓰인 전분 공장이 있었다.

 

 

 

4.3 기간 동안 274명이 학살된 곳으로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을 한 밧줄에 묵어 맨 위의 사람을 죽여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떨어져 죽도록 했던 4.3 처형장소였다. 또한 이곳에서 사람들의 고문받는 고통의 소리도 많이 들렸던 곳이다. 
 
 
 
제주 4.3사건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고 그로부터 2년 후 1947년 제주도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광복 직후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시기다. 일제 강점기때 앞장 서서 주민들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은 미군이 들어온 틈을 타 친미파로 변신, 일부가 등용되고 주민들에겐 친일경찰이 여전히 위세를 떨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1947년 3월1일 열린 제주도 3.1절 기념행사에 현장을 살피기 위해 나와 있던 기마 경찰이 탄 말 발굽에 6살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수습도 없이 경찰이 그냥 가버렸다.

 

 

항의하는 군중을 경찰은 폭동으로 오인했고 군중을 향해 발포를 한다. 총 6명의 사망자가 생기고 그 중에 한 사람은 폭동과 상관없는 초등학생과 아기를 안은 엄마도 있었다.

 

 

 

이렇게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분노에 휩싸인 제주도민들은 책임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며 3.10 총파업에 돌입한다. 그 중에 양심있는 제주출신 경찰 포함 95%가 참여한 민.관합동 총파업을 한다. 이에 인력 충원과 집압을 목적으로 육지에서 경찰들이 들어오는데 그것이 응원경찰이었다. 극우 반공주의 서북청년회까지 섬을 밟고 1년간 탄압과 고문의 대상이 된 섬사람들이었는데

 

육지에서 경찰이 또 들어온 것이다. 이 육지의 응원 경찰이 바라본 제주도는 사상이 불온한 토벌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1947년 3.1 사건 이후 1년간 2500여 명 검속하고 잇단 검거와 고문치사로 섬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다. 1946년부터 남한 단독정부수립 주장이 나오고 정부수립을 위해 헌법 재정과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뽑는 5.10 총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러나 국회의원이 뽑히면 남북한 민족이 갈라지니 이렇게 남북한이 나뉘는 것을 막으려고 예정된 5.10 총선 한달 전인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의 사회주의자들이 한라산 중턱 오름에서 무장봉기를 한다. 

 

 

이 무장대는 경찰의 탄압중지와 단독정부 반대를 슬로건으로 선거사무실을 불태우고 2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참혹하게 희생을 당한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싸움은 방화와 학살로 이어졌고 이 상황에서 1948년 5.10 총선거를 실시했으나 제주도 2개 선거구 투표율 미달로 200명 중 198석만 당선되어 무효 처리가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건국을 방해한 불온 세력으로 낙인찍혀 버린 섬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공권력으로 진압해야 될 폭도의 땅으로 규정되어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출입하면 폭도로 간주, 무조건 사살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고립된 섬에 생사를 가르는 선을 긋고 해안가로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이후에 산에서 발견되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섬 전체에 초토화 작전을 강행, 삼진작전으로 (굶겨 죽이고, 태워죽이고, 죽여 없앤다) 소탕을 시작한다. 

 

삶의 터전이던 마을은 불타 사라지고  미처 못 내려오고 동굴에 숨어있던 일부 주민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 사살되었다. 그렇게 중산간 마을의 90%가 전소되었다. 

 

제주도민 열 명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은 3만명이 학살당한다.  
 
 
 
안인행 씨의 증언
 
당시 4.3 피해자인 당시 13살이었던 안인행 씨의 증언에 의하면

 

 

7살, 4살 동생들이 있었고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동생들과 엄마를 토벌대가 끌고갔고 엄마가 애들만은 살려달라 사정하니 4살,7살 동생들은 풀려났으나 당시 13살 안인행 소년은 무장대에게 정보를 밀고할 수도 있다 하여 처형을 결정하고 엄마와 함께 총살을 당한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 엄마가 본능적으로 아들을 끌어 안았고 쓰러지는데 엄마 등 위로 총알이 쏟아지는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안인행 소년은 엄마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이 너무 많이 있다고 한다. 
 
 
영모원 
 

 

 
영모원은 4.3 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하귀마을 사람들이 기부금을 모아 만든 추모탑이다. 

 

경찰과 주민등 4.3 사건으로 희생된 모든 희생자를 위로하는 공간이다.
 

 

묵렴후 4잔의 술을 올리는데 4잔의 의미 -남 녀 노 소이다.  제주도에는 어디를 가나 4.3 사건의 아픔과 흔적이 남아있다. 

4.3 사건 이후 행방불명된 이들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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