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8-2회]
오늘의 탐사지: 군산
주제: 군산 일제의 수탈
출연자: 설민석, 진세연
지붕없는 박물관
군산 원도심 (=시간여행 마을)
군산 시간여행 꼬마 기차
홈페이지
https://www.gunsan.go.kr/tour/m2078
진포해양테마 공원
뜬다리 부두 (부잔교)
부잔교 : 군산 내항과 바다를 이어주는 물 위에 띄워 만든 뜬다리 부두
조수간만의 차로 밀물과 썰물 때의 수위 차가 큰 서해는 바닷물이 빠지면 배가 부두에 정박할 수 없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물에 뜰수 있는 큰크리트 구조물의 정박시설을 건설해 바닷물 수위에 따라 상하로 움직일 수 있게 한 뜬 다리이다.
썰물때 바닷물이 빠지면 다리가 내려가 있고 밀물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다리가 올라와 조수간만의 차에 상관없이 물건을 실어나를 수 있게 한 뜬다리 부두
뜬다리 부두가 만들어진 목적은 일본의 쌀 수탈을 위한 목적이었다.
침략과 수탈을 노리는 외세의 접근으로 항구의 개항이 이루어지는데 1876년 가장 먼저 개항한 항구는 부산항이다. 일본과의 근접성으로 부산항을 시작으로 인천 목포 진남포를 개항하며 6번째로 군산항이 개항을 한다.
조선 시대에 화폐 역할을 한 쌀로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 호남평야에서 쌀의 절반이 나오고 있었다.
호남평야에서 건둔 쌀이 모이는 곳이 군산이었고 군산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 주변에 있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임시로 모아두던 조창에서 나라에 바칠 곡식을 실어나르던 배인 세곡선(=세금으로 낼 곡식을 싣는 배)이 향한 곳이 군산이다.
군산의 쌀 반출량은 임금님 뿐만아니라 전국으로 펴지며 호남지역에서 제일 컸기 때문에 조선의 쌀이 모이는 중심지였던 군산은 개항 후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1899년 군산이 개항을 하면서 일본의 쌀 수탈이 시작되며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된다.
군산의 특이한 카페인문학 창고 정담 카페
부잔교 근처 옛 군산 세관창고로 쓰였던 군산의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08년 창고 건물에서 다시 태어난 카페 이다.
당시 회수한 밀수품을 보관하던 곳으로 현재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카페로 운영 중이다.
옛 군산세관
(호남관세박물관)
지금은 호남 관세 박물관으로 운영 중으로 1908년도 당시 군산항의 실제 세관 업무를 보던 건물로 1993년까지 85년간 사용된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때 호남과 충청의 쌀 수탈의 창구로도 이용되었던 아픈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국내 3대
서양고전주의 건축물
한국은행 본관 건물, 서울역 건물, 옛 군산 세관인 호남관세박물관이다.
군산의 개항 모습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인 전군가도 도로부터 건설된다.
그 후에 부잔교 뜬다리부두가 세워진다.
일제의 자본으로 지어진 교통로들로 이 세가지 모두 수탈을 위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한 일제의 밑그림이었다.
근대 역사 박물관
인력거를 지나면
채만식의 소설<탁류>
일제 식민지의 비참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소설 <탁류>
그 탁류에 휩쓸린 도시 하층민을 그린 소설 <탁류>와 같이 그렇게 식민지 시대의 탁류가 휘몰아친다.
1910년 조선을 장악하게 된 일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을 수탈한다. 그 중에 가장 핵심이 쌀 수탈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중국으로 가는 교두보(근거지)와 쌀 수탈이 가능한 곡창으로 생각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산업화가 되면서 쌀 생산량이 떨어졌고 조선에서 쌀을 수입하자고 생각했다. 전체 쌀 생산량을 늘려 조선이 필요하지 않는 나머지 쌀을 가져가겠다는 계획이 바로 산미증식계획이다.
산미 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밭을 논으로 바꾸고 화학비료, 수리시설 개선 품종개량 씨앗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지만
일본이 정한 목표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실제 생산량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원하는 양을 가져가 버린다.
이렇게 되니 조선의 쌀값은 폭등을 하게 되고 먹을 것이 없던 농민들은 쌀 대신에 만주에서 수입한 조, 수수등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그 당시 끼니를 제대로 못 챙기는 사람이 전체인구의 76%에 달했다.
이런 굶주림은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조선 저체가 고통을 받았다.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피죽의 의미는 먹을 쌀은 없고 조.수수로 연명하다 그것 마져 없게 되고 벼농사를 지으면 벼 옆에 자라는 벼의 양분을 빼앗는 잡초인 '피' 로 끓인 죽이 피죽이었다.
농민들은 1년에 최대 1억 장의 가마니를 짜기 위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가마니를 짰고 가마니 짜기가 농민 수탈의 상징이 되었다.
1926년 군산항 축항 기공을 기념한 기념 쌀탑
대략 쌀 800가마니로 쌓은 축하탑이었다. 조선 농민들의 피 땀 눈물을 쌓아 올린 것이다.
군산 발산초등학교시마타니 야소야의 집터 속 금고
시마타니 야소야는 군산의 땅을 엄청나게 약탈한 자이다. 그가 소유한 땅만 해도 145만 8천 평으로 면적이 여의도 2배의 크기를 가지고 있던 시마타니는 땅과 쌀을 수탈하는 것으로 모자라 뺏앗은 쌀을 판 돈으로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해 이 금고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금고 문에는 메이드 인 U.S.A 로 당시 최신 미국 기술을 도입해서 만든 철통보안의 금고였다.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건물에 창문이 없었다.
지하 1층에는 음식 저장창고로 비상시에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1층에는 현금과 땅문서들을 보관 .. 땅문서와 돈이 너무 많아 일반적인 방에는 보관 불가2층에는 도자기 등의 조선의 문화재를 보관
▼지하에 많은 양의 음식물을 저장했던 곳 비상시에는 벙커로 사용되엇다.
지상 1층
이것 말고도 창고 안에 못들어왔던 석물들이 숨겨놨던 비밀의 정원이 있었다.
유물들의 원래 위치를 알지 못해 임시로 이름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광복 후 한반도 남쪽으로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문화재 반출 자체를 엄격히 통제하게 되면서 가져 갈 수 없게 되자 귀하 신청을 을 하지만 귀화 자격 심사에서 떨어진다. 결국 우리 땅에서 쌓은 부와 보물들을 뒤로한 채 시마타니 야소야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광복 후 그가 수집한 문화재들은?
금고에 있던 문화재의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도 있지만 다수의 문화재들이 행방불명이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 지주들은 180도 바뀐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약 47만 명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환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에게 1000엔 이상 소지 금지
소지 물품은 휴대 가능한 정도로 제한한다. 일본인들은 그때 속옷 속에까지 돈을 쑤셔 넣었다고 한다.
남아 있던 일본인들도 힘든 생활을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예로 남아 있던 일본인 여교사는 학교에서 쫓겨난 후 가르치던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거나 생활이 어려워진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이발소, 음식점 등에 일을 하게 되는 완전히 입장이 뒤바뀌는 상황이 되었다.
[선녀들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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