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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진관사와 서희의 외교담판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7회)

by 365 ^^ 202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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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7-2회]

 

오늘의 탐사지: 진관사 

주제: 서희의 외교담판
출연자: 설민석 최수종

 

 

진관사 

 

 진관사에 고려시대 진관대사가 목숨을 위협받던 대량원군(현종)을 숨겨주어 진관대사에 대한 보은으로 스님의 이름을 딴 진관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산 진관사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은 재위 6년 아직까지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조카 대량원군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는데 그는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과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천추태후의 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이었다. 고려 초기 많은 정쟁 속에서 왕족들이 죽게 되어 이 무렵이 되니 대량원군이 유일한 태조 왕건의 핏줄이었다. 이런 대량원군이 왕이 되면 천추태후는 권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중 그녀 나이 40세 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탄생한다.  

 

진관사 극락교

 

이에 자신 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 대량원군을 강제로 절에 보낸다. 삼각산 신혈사로 출가한 대량원군에게 천추태후는 술과 떡을 보냈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진관 스님이 대량원군을 땅굴 안에 숨기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이를 먹이니 새들이 바로 죽어버렸다. 이모에게 독살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진관스님을 위해 대량원군은 나중에 진관사라는 절을 지어주었고 그것이 지금의 진관사이다. 

 

진관사 극락교

 

진관사 해탈문
삼각산=북한산 진관사 :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위치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려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를 많이 벌인 나라이다. 11세기 거란족의 침략 12세기 금나라 여진족의 침략 13세기 원나라 몽골의 침략14세기 북쪽으로 홍건적 남쪽으로는 왜구가 동시에 위협하고 있었다. 


왕건의 업적

 

각 지역의 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정략결혼 전략으로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왕건을 지지한 호족들에게 왕건의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정책을 펼쳤다. (전현무->왕현무) 원래는 이름만 왕건이었으나 왕을 떼어내어 하사를 한 것이다.

 

 

이러한 통합정책들로 호족을 포섭하고 분열돼 있던 지역과 민심이 통합되어 안정을 찾아간 고려였다.


북진정책

옛 고구려를 계승하려 한 왕건은 평양을 중요하게 생각해 평양을 전진기지 삼아 북진 정책을 추진해 옛 고구려 영토 회복을 시도한다.

 

그러나 왕건의 북진정책으로 거란과 전쟁이 일어난다. 거란의 목표는 중국 송나라였다. 송을 치러 간 사이 고려의 공격을 염려해 고려와의 화친으로 걱정을 덜고 싶었던 거란이었다.

 

 

그래서 942년 사신들과 낙타 50필을 보내 친선 도모를 꾀하지만 그 사신을 모두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에 묶어 굶겨죽인다. 

 

 

이유는 발해의 유민을 흡수해 있는 상태에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손잡으면 고려의 내분을 염려해 거란을 배척한다. 고려의 입장에서 거란은 발해를 멸명시키고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한 원수의 나라였다. 이렇게 거란을 고려의 적으로 만들어 정치적 안정을 꾀한 것이다. 

 

 

 

 

거란의 침입
이렇게 거란과 고려의 외교가 단절되고 난 후 고려의 6대 왕 성종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다. 명분은 송나라와 친하고 거란을 배척하는 친송배거 정책에 불만을 품고 80만 명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1차전 봉산성 전투

 

국경선 근처인 봉산성에서 맞붙지만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군을 격파한 후 왕과 신하가 직접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으면 절멸을 시켜버리겠다고 위협을 한다. 거란의 무시무시한 기개에 겁먹은 대신들은 송의 기록<신오대사>에 기록된  거란족의 무시무시한 야만성을 표현한 부분

 

심지어 거란족은 사람 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희의 외교 담판 

무서운 거란족을 맞아 고려의 대신들은 서경 이북 평양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나왔으나 모두가 할지론을 주장할 때 오직 서희만이 할지론을 반대한다. 그때 거란과의 2차전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한다.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항복만 독촉을 하기 시작한다. 사실 거란은 언제 송나라가 처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에 군대 80만을 데리고 고려에 왔다고 한 것인데 거란 80만 병력설의 근거는 소손녕이 보낸 서신에 쓰여진 병력이 80만이라 쓰여 있던 것일 뿐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군사 전략가이기도 했던 서희는 당시 소손녕은 지방군의 동경유수 직책의 책임자일 뿐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고 지방관인 소손녕이 80만의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며 이것을 간파하고 서희는 담판을 짓기 위해 나선다. 

 

이렇게 서희와 마주한 소손녕은 

 

서희의 대답은 당신은 거란의 장수고 나는 고려의 관리로 양국 대신들이 만났는데 무슨소리? (왕도 아니면서 같은 공무원끼리 왜 이래요~~) 그러나 소손녕의 거듭되는 요구에 서희는 막사에 들어가 누워 잠을 자버린다. 이에 소손녕이 너무 기이해 하고 서희의 기개에 당황한 소손녕은 서희를 정중히 모실 것을 명한 후에 누각에서 서로 맞절을 하고 담판을 시작한다. 약자의 입장임에도 당당히 협상에 임한 서희였다. 거란족 소손녕의 진짜 목적은 고려가 아니었다. 송과 대립 중인 거란은 고려의 존재가 신경 쓰였던 것으로 판단한 서희는 여진만 몰아내 주면 거란과 손을 잡겠다고 한다.

 

 

이에 거란병력의 철수와 함께 송과의 관계를 끊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지역을 획득함과 동시에 

이것이 강동6주

 

피 한방울 없이 강동 6주를 서희이 외교 담판으로 얻어낸 지역이다. 

 

 

거란을 돌려 보낸 후 송나라와의 관계 정리
중국 역사상 가장 군사력이 약한 나라는 송나라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 그런 송나라에서 만든 것이 성리학이다. 이렇게 송이 거란에 맞설 군사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맞서 군사를 일으켜 도와줄 것을 요청하나 예상대로 송은 고려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니 오히려 송나라가 고려에 등을 돌리는 것처럼 만든 셈이다.  

 

▼선녀들 57-1회 보기


☞연천 당포성과 숭의전 속 고려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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