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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연천 당포성과 숭의전 속 고려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

by 짱신나^^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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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7-1회]

 

오늘의 탐사지: 경기도 연천 

주제: 후삼국 통일 과정 
출연자: 설민석 , 최수종

 

 

경기도연천

연천 전곡리 유적
군사도시로도 유명한 연천

 

 

연천 당포성 

고구려의 방어성 중에 하나였으나 지금은 성곽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가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성이다.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쪽 면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

당포성은 고려의 수도가 있던 개성(=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개성은 송도 송악 개경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던 곳이다. 옛 고려의 수도 개경이 지금은 북한에 있는 개성이다. 

 

보통 적들이 아래에서 위로 고려를 쳐들어올 때 강줄기를 따라서 움직여야 물을 보충하고 기나긴 행군을 버텨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당포성은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이 길목을 잘 지켜야 고려 수도 방어도 가능했고 고려 이전 삼국시대부터 당포성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극시대 

 

남북극시대에 통일신라 왕실이 몰락을 시작하면서 신라는 세 나라로 분열된다.  처음에 만들어진 나라는 900년 견훤이 세운 후백제

 

그 다음이 궁예의 후고구려 (901년)이다.  고려의 탄생은 후고구려의 궁예로부터 시작된다. 

 

 

 

궁예 탄생설화

 

궁예는 5월5일 왕족의 신분으로 태어났는데 하늘을 감싼 신비한 빛이 보였고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신라의 후환이 될 것이니 키우면 안된다고 하여 결국 신하를 보내 궁예를 죽이기로 한다. 높은 곳에 올라 아기를 던져버렸으나 밑에서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를 받았다.

 

그러나 아기를 받을 때 실수로 손가락이 아이의 눈을 찔러버려 한쪽 눈을 실명하지만 궁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렇게 유모와 살다가 10살때 유모가 궁예가 왕족임을 밝히니 궁예는 충격을 받고 출가를 결심한다. 성년이 되어 승려가 된 궁예는 남몰래 품은 야심이 있었고 왕족 신분을 되찾기 위해 활쏘기 연습에 매진한다.

궁예: 활을 잘 쏘는 사람의 후손이란 뜻

 

때가 되어 궁예는 절을 내려왔으나 승려 출신이라 지지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힘을 키우기 위해 세력가의 부하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인물이 강원도 원주의 지도자 호족 양길이었다. 

 

이후 양길의 부하로 들어간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얻어 강원도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한다. 

 

그 모습을 본 양길은 위기의식을 느껴 궁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아 챈 궁예는 먼저 양길을 기습 공격해 양길을 제거한다. 이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901년 후고구려이다. 

 

 

왕건 탄생설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뱃사람 출신으로 송악(개성)에서 해상 무역을 하여 부잣집이 된 호족 집안이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전설은 어느날 배를 타고 왕건 할아버지가 중국을 가고 있던 중 바다에 은빛 여우(늙은 여우)가 나타났고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이 활을 쏘아 늙은 여우를 퇴치하니

 

그 순간 물회오리와 함께 서해 용왕이 나타나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선물, 그렇게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혼인을 하고 그 사이에 낳은 아이가 왕륭=왕건의 아버지이다. 이런 아버지에게 태어난 왕건은 용왕의 후손으로써 예성강 일대의 해상세력을 이끌게 된다.  

 

왕건의 이름은 풍수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도선대사를 왕건의 아버지 왕륭의 집앞에서 마주치고 도선대사가 일러준 곳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아이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그 아이의 이름은 건이라고 지으라 했다.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다. 

 

 

왕건과 궁예의 첫 만남 

 

895년 궁예의 위세가 올라가던 시기에 왕 씨 일가의 세력을 키워 줄 아들 왕건을 데리고 궁예를 찾아간다. 왕건을 보니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고 궁예는 왕건을 부하로 들이기로 한다. 그후 견훤과의 두 차례에 걸친 나주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며 입지를 다지지만 궁예 입장에서는 커지는 왕건의 세력이 불안했다. 궁예는 송악(개성)에서 왕건 집안의 경제적 지원으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왕건의 세력이 커지자 불안해진 궁예는 원래 자신이 활동하던 (강원도 철원) 마진으로 도읍를 옮긴다. 그리고 국호를 마진에서 클 태 영토 봉 태봉으로 변경한다.

 

 

 

이 모든 과정은 궁예가 왕건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자신이 양길을 배신을 하고 권좌에 올랐듯이 왕건도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니 점점 불안감이 밀려들고 의심병이 생겨 폭군이 되어 가고 있었다.

 

왕건은 나주 전투 이후에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시중'이 된다. 궁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뒤 궁예는 폭정을 하기 시작한다. 관심법 =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며 부하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어느날 관심법으로 살펴보니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왕건의 마음을 떠보는데 이때 신하 최응의 귀띔으로 역모를 꾸몄다고 허위고백을 한다.

 

 

순순히 인정하는 왕건을 보고 궁예는 많은 선물을 내렸다고 한다. 왕건은 관심법의 신통함을 증명한 사람이니 모반을 꾀하여도 살려놔야 했기에 왕건을 용서해준 것이다.  이렇듯 궁예의 의심과 광기가 날로 심해지자 궁예의 폐위를 논하기 시작하는데 왕건의 측근 신숭겸이 왕건이 혁명을 도모하길 제안하나 이를 거절하니 신숭겸은 말한다.

 

그리하여 왕건은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여러 지방 호족 출신들이 추대로 시작된 왕건의 혁명은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혁명이 시작되었고 이에 놀란 궁예는 황급히 몸을 피하지만 패악질을 일삼던 궁예의 최후는 백성들에 의해 피살되며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드라마 왕건에서는 궁예의 인기가 많아 궁예의 죽음을 멋있게 미화시켰다고 한다. ) 이렇게 포악한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왕건은 송악(개성)으로 천도 후 918년 고려가 탄생하게 된다.

 

 

 

고려 건국(918년)

 

 

출신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불교를 바탕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회를 형성하며 고려를 이끈다.

 

후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고 그 때마다 고려는 신라를 도와주었고 그런 가운데 발해가 멸망을 한다.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고 이들을 흔쾌히 수용하는 포용정책 등으로 왕건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에 조급해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55대 왕 경애왕에게 자결을 명한다. 이에 왕건이 달려왔으나 이미 때는 늦어 경애왕은 죽게된다. 


공산 전투(927년)

왕건과 견훤은 대구 팔공산에서 맞닥들이게 되고 이 공산전투에 왕건은 대패를 한다.

 

해전에 능숙한 왕건은 육지전에 강한 견훤을 맞아 왕건의 5천여 명 군사들이 거의 전멸하게 된다. 왕건의 부하가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나가 장렬히 전사한다. 신숭겸등 왕건의 충신인 고려 장수 8명이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모두 죽고 왕건만 살아 도망하게 된다.

 

고창전투(930년)

이후 왕건은 철저한 준비를 하여 3년 뒤 견훤과 다시 고창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자만심에 빠져 방심하고 있었고 고창지역 호족들을 회유하고 지원을 받은 왕건이 승리하게 된다. 이후에 견훤의 부하들이 왕건 쪽으로 이탈을 한다.  

 

신라의 멸망(935년)

 

견훤이 후계자 계승을 위해 평소 총애하던 넷째 아들 금강을 왕위에 올리면서 분노한 첫째 아들 신검을 중심으로 삼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제거하고 아버지인 견훤까지 금산사 절에 유폐한다. 이에 견훤은 왕건에게 투항을 한다.

 

왕건은 그런 견훤을 국가 최고의 어른으로 추대는 물론이고 다양한 재산까지 제공한다. 그 모습을 보던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도 투항을 한다. 그리고는 왕건은 경순왕에게도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고 상속도 되던 식읍으로 경주 지역을 통째로 맡긴다. 이렇게 경순왕의 항복으로 신라를 흡수하게 된다. \

 

후백제의 멸망(936년)

이제 남아 있는 신검의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일리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회유와 후백제 군사들의 사기저하 등으로 대승리를 하면서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다. 견훤은 자신의 아들 신검의 처형을 원하지만 왕건은 그를 포용하고 견훤은 화병으로 등창(종기)이 나서 사망한다.  

 

후삼국통일 (936년)
고려는 918년 왕건이 건국하지만 936년 후삼국 통일을 이루며 완벽한 고려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연천 숭의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숭의전은 고려 시대 왕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이곳에는 태조와 현종을 비롯한 4명의 왕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 종묘와 같이 고려시대에도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태묘를 설치했고 고려의 태묘는 왕권왕화를 위한 중국식 태묘를 본받아지은 것으로 그 시작은 고려 6대왕 성종때 부터였다. 

숭례문과 같은 숭 의를 존중한다는 뜻의 숭의전
 
고려 성종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유교식 정치체제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다. 
숭의전 사적 제 223호

 

 

숭의전 내부
고려 4명의 왕과 신숭겸을 비롯한 고려 개국 공신 16인이 잠들어 있는 곳

 

 

2006년도에 평양에서 온 북한 유물 전시 중에&nbsp; 왕건 동상 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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