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사건이란?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21에 일어난 사건으로 31명의 북한의 124 부대 무장 특수 부대원이 우리나라로 침투한다. 이들은 북한산 일대를 지나 서울 시내로 진입에 성공한다. 청와대 근처까지 접근했다.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김일성이 만든 상위 1%의 특수부대가 대한민국 최초로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무장공비였고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큰 사건이었다.
북악산은 김신조 사건 이후 1969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후 2007년 개방하기 시작하여 2022년까지 순차적으로 개방될 예정이며 그중 작년에 개방된 북악산 남북을 가르는 한양 도성로 성곽에 4개의 출입문을 만들어 북측면 탐방로를 연결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한양 도성은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성 기능을 수행한 한양 도성으로 600년 서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김신조 사건(1.21 사태)는 왜 일어났나?
1960년대에 북한은 적화통일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다. 초기 계획은 청와대, 미국 대사관 등을 일제히 공격해 서울 일대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1000명의 공작원을 남파시켜 남한을 장악하고 정부에 대한 원망으로 국민들이 북한 편을 들거라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인민군이 공격하면 적화 통일을 이룰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러한 계획을 옮기기 위해 북한은 만여 명의 특수 부대를 양성하고 그중에 31명의 최정예 요원을 보냈던 것이다.
이들 이외에서도 남파된 간첩들이 매우 많았는데 1955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남북한의 군사충돌은 1,400여 건 정도였다. 그 중에 절반이 60년대 후반에 집중되어 있다..
124부대의 훈련 내용
- 빠른 행군 속도가 관건이므로 맨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굳은살 박인 발바닥을 만들기 위한 훈련.
- 최강의 정신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 -무덤을 파서 시체 옆에서 자는 훈련.
- 모의훈련을 실제처럼 실시했는데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인민위원회 당사를 타켓으로 실제로 침투 훈련 사실을 전혀 몰랐던 인민위원회와 교전까지 벌였다. 김신조의 회고록에 따르면 부상자도 여럿 발생했다고 한다.
1968년 1월 13일 124부대 남하라는 지령이 내려오고 1968년 1월 16일 31명 부대원이 개성에 집결을 한다. 17일 날 혈서를 작성 후 드디어 출발을 한다. 필수품만 넣은 30KG 가방을 챙겨 떠났다. 가방 속에는 총기와 민간인 위장용 옷가지들, 말린 오징어, 엿 같은 허기를 채울 간식도 있었다.
개성-> 서울까지 100km를 단 5일만에 왔다. 시속 12km로 뛰어왔다는 것이다. 20~30kg를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고 개인무장은 PPS-43(30 발연사 기관단총)+TT권총, 1인당 실탄 350여 발, 수류탄 14개, 대전차 수류탄 2개를 개인이 무장하고 왔다. 국군 1개 연대(2천여 명)하고 붙어도 되는 무기들이었다.
김신조 루트 62km
(개성-군사분계선-임진강-파주 삼봉산- 진관사- 북한산 비봉 사모바위)
1월 17일
군사분계선을 넘는다. 철조망을 끊어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뒤 흔적을 없애기 위해 다시 끊은 철조망을 연결해놨다.
1월 18일 밤
임진강을 넘는다. 한겨울이라 꽁공 얼어붙은 임진강을 강추위였지만 낮에는 잠복을 하고 있다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야간행군(밤 9시~새벽 5시)을 했다. 잠복 중 잠들면 얼어 죽기 때문에 서로를 흔들어서 깊이 잠들지 못하게 잠깐씩 토끼잠을 잔 124부 대원들이었다.
1월 19일 10시
파주 삼봉산에서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의 눈에 띄게 되고 계급장도 없는 국군 복장으로 질문도 이상한 무장한 군인들에게 이상함을 감지한다.
부대원은 형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북한에 통신문을 보내고 북한에서는 작전 철수 명령을 보냈으나 난수표로 암호(원대복귀)를 해독하지 못해 우 씨 형제의 처리를 두고 의견 대립을 갖게 된다. 31명은 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18:13으로 살리자로 결정이 나고 우 씨 4형제에게 신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공산당 입당 원서를 쓰게 하고 돌려보낸다.
1월 20일 오전 6시경
산에서 내려온 형제는 바로 전화로 신고를 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시행되고 불안을 느낀 북한 공작대원들은 행군 속도를 올려 이동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 북한산 진관사 ,비봉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급속 행군 탓에 한국군의 예상 포위망을 벗어나 한참 앞서간 북한군이었다.
1월 21일 저녁 8시경
서울 시내로 하산한 124부대는 군복을 벗고 사복(트렌치코트)으로 갈아입고는 민간인 행세를 하고 활보하게 된다. 그리고 3번의 검문에 걸린다.
1차 검문
검문소에 2명의 경찰이 있었고
세검정 파출소 순찰 중이던 서대문 경찰서장에게 눈에 띄게 되고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이에 CIC 방첩대라고 둘러댄 북한군을 일단 보내고 31명의 수상한 무리를 바로 무전 보고 한다.
2차 검문
종로경찰서 형사 2명(박태안과 정종수 형사)이 검문을 하고 또다시 특수부대 훈련 끝나고 가는길이라 주장하는 북한군을 일부러 말을 걸어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3차 검문
종로 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정확하게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움직일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충돌이 시작된다. 그 상황에서 뒤에 일반버스가 오는 것을 지원병력 버스로 착각해 버스에 총을 난사 버스에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현장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수많은 경찰들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와중에 최규식 종로 경찰서장과 정종수 형사는 그 자리에서 순직한다.
김신조 루트
2010년 42년만에 개방된 루트로 서울 속의 DMZ라 불리던 곳이다.
1.21 사태 소나무
그리고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북한군을 잡기 위한 10흘간의 소탕작전이 시작된다. 1월 21일 이후로 계속 교전이 있었고 31명 중 28명이 사살, 2명이 실종 1명이 생포된다.
진짜 김신조 루트
김신조는 인왕산을 넘어서 세검정으로 내려와서 하천 큰 바위에 훔어있었는데 국군이 불빛을 비추며 나오라고 했고 자폭용 수류탄을 내려놓고 투항한 곳이다.
1월 22일 새벽 2시
생포된 북한군이 바로 김신조이다. 김신조는 처음에 세검정 근처 계속에 숨어있다가 수류탄 한 발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포위가 됐고 나와서 투항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수류탄도 놓고 스스로 투항한다. 당시 27살이었던 김신조이다.
김신조 근황
김신조는 총을 한발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1970년 4월 10일 풀려난다. 이후에 사람들에게 협박과 시달림을 많이 받게 되고 반공강사로 북한 체제에 대한 반공 강연을 하다가 인생 후반기에 목사의 길로 접어들어 생활하고 있다. 우 씨 4형제 중 우성제는 파주보안과장으로 있다가 퇴임 후에도 김신조와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김신조 사건의 나비효과
김신조 사건 이후 방첩대장이 김재규로 바뀌게 되고 김재규는 이를 통해 중앙정보부장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0.26 사태까지 이어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게 된다.
육군과 해군은 군 복무기간이 6개월이 늘어나서 36개월이 되고 해군과 공군은 39개월이 되었고 주민등록증이 생겨났다. 최초 발급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또한 휴전선 철책도 생겼다.
1호 번호는 110101-10001로 앞자리는 생년월일이 아닌 지역번호 12자리였다. 110101은 종로구 청운동의 지역번호였다. 13자리 생년월일은 1975년에 개편이 되었다. 또한 교련과목시설, 향토예비군, 남산터널, 북악스카이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5회 후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6년 강릉 잠수함 발견)
선녀들 마스터 5회 전반 흑금성 박채서 스파이 영화 <공작>의 주인공
1.21 사태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한국사회 미친 영향이 이렇게 많았다(역사저널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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