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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6년 강릉 잠수함 발견)

by 365 ^^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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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강릉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이 발견되었고 잠수함에는 각종 무기 및 CCTV를 통해 무장공비가 잠수함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49일의 무장공비 소탕작전 과정과 행방불명되었던 한명의 근황을 알아본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6년 9월 18일 수요일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강원도 강릉의 한 택시 기사는 자정을 넘어 여자 승객을 태우고 조용한 도로 위 야간 장거리 운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정이 넘는 시간 어두운 도로에 정체불명의 수상한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안인진리 해안 근처를 지날 무렵 정체모를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 불빛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잠수함 발견

어둠 속에서 본 것은 시커먼 돌고래 새끼 같은 것이 올라와 있었고 번쩍번쩍 섬광이 보이고 사람 비명소리까지 들렸다.  택시운전사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들은 경찰은 수상함을 느끼고 신고 장소를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잠수함이었다. 북한 무장 간첩들이 타고 온 잠수함은 100톤 급이 넘는 규모로 최대 승선 인원 25명 이상의 잠수함이었다.

 

강릉에서 발견된 잠수함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 잠수함

 

수색작전 돌입

전투조가 내륙으로 침입한 것은 2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대규모 수색 작전을 펼친 군경이었고 야간 통행 금지가 부활을 했다. 일시적으로 강원도 일대는 밤 8시 이후 야간 통행을 금지를 지켰다. 당시가 추석을 앞둔 시점이라 성묘는 가야했기에 사람들은 이동시 주민등록증과 태극기를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제 3차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도했고 우리 군은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준 전시 상황으로 우리 군은 완전 무장하고 잠수함 근처를 수색한다. 


진돗개 경보 
국지적 위협 상황에서 발령되는 단계별 경보 조치로 진돗개는 3개가 있다. 

진돗개 셋-평상시 상태
진돗개 둘-무장간첩의 칩투 예상
진돗개 하나-최고 비상경계 태세(준전시 상태)

 


잠수함에서 발견된 것들

 

충성결의문
수색 중 잠수함에서 편지 한통이 발견되는데 전형적인 북 간첩의 충성 결의문이 있었다. 

충성의 맹세문 내용
충성의 맹세문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장군님께  삼가 올립니다.



각종 무기들
그리고 잠수함 안에는 사람은 없고 AK소총과 기관총, 실탄이 100발정도 남아있었다. 이것이 무서운 것은 무장공비가 왠만한 무기는 들고 갔을텐데 남아있는 것이 이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잠수함에서 발견된 무기들
잠수함에서 발견된 무기들

 

무장공비들은 잠수함에서 무엇을 했나?

당시 정동진 앞바다에 파도가 높아 직진을 하다가 옆으로 잠수함이 밀리면서 암초에 걸린 후 풀스피드로 엔진을 돌리다 스크루까지 완전히 파손되고 잠수함에서 증거 인멸을 시도한 무장공비들이다.  공작 활동과 관련된 각종 문서들을 불태워 인멸시킨다. 택시기사가 목격했던 섬광은 문서를 소각하는 불빛이었던 것이다.

보통은 잠수함 윗부분에 개폐식 문을 통해 출입이 가능했으나 북한의 잠수함에게는 바다 밑에 잠기는 밑에 출입문(비밀통로)이 존재했다. 이것이 북한 잠수함 CCTV에  고스란히 모두 찍혀 있었다. 북에서 침투조 평가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카메라였다.  

 

     북한 무장공비들이 비밀통로를 잠수함에서 빠져나가는 모습 CCTV 

 

11명 무장공비 시신 발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한 대한민국은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고 무장공비 침투 15시간 후 잠수함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8KM 떨어진 곳 강릉 청학산 계곡에서 무장공비 11명이 시체로 발견된다.  당시 우리 군경은 수색 중이었고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충격적 내용 사진 포함.클릭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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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산에서 발견된 11구의 무장공비 시신 모습

 

그때까지도 무장공비 총인원도 불확실했다. 시체들의 공통점은 관자놀이에 발견된 총상이었다. 죽은 시신은 일반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이 묶인 채 처형당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죽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민간인이 살해된 것인지 무장공비들이 죽은 것인지조차 확인이 어려웠다. 시체를 수색하던 중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다. 유서의 내용은 작전에 실패해서 죄송하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쳐 떠나겠습니다. 였다.

 

집단 자살한 이유는? 

그리고 11명 모두 집단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북한은 작전 실패 시 자결이 원칙으로 3인 1조로 검거될 경우 조장이 조원을 사살 후 자신도 자결한다는 것이 원칙으로 조원들을 처형시키는 것이 조장의 역할이었다. 또한 북한이 어릴 때 무장공비를 뽑아가서 첫 훈련부터 끝까지 가장 많이 받는 훈련이 자폭정신이다. 

자결한 11명은 전투 능력이 없는 단순 승조원이었고 수색이 진행되면 가장 먼저 체포될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작에 필요없는 인원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한다. 죽은 11명 중에는 김동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령에 해당하는 대좌였고 북한에서 이미 2중 영웅으로 남파 2번을 성공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자결해 3중 영웅 칭호를 얻게 되었다.   

 

시체 발견 10분 전 

무장공비 일당 중 1명을 긴급 체포했다. 그는 승조원으로 11구 시체 발견 10분 전에 경찰에 의해 생포된 인물이다.  

생포된 무장공비 생존자 이광수
당시 생포된 무장공비 생존자 이광수

 

이광수는 어떻게 생포되었나? 

이광수는 군인이 아닌 뱃사람으로 23명중 가장 마지막으로 이동했던 인물이었는데 어두운 밤 자신의 일행을 놓쳐버려서 낙오되었던 것이다. 만약 낙오되지 않았다면 12번째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이광수 위치를 알린 민간인 홍사근 정순자 부부
이광수를 생포하는데 일등 공신은 민간인 홍사근 정순자 부부


1996년 9월 18일 오후 4시 30분 강동 파출소로 전화가 걸려온다. 파출소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제보였고 경찰이 올때까지 자연스럽게 이광수에게 말을 건네며 시간을 끌다가 그때 잡힌 것이다. 나중에 이광수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산골에 전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광수의 생포로 무장공비 인원이 26명인지를 알게 된다. 

 

무장공비의 침투 목적

 

이들의 침투 목적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그 당시 1996년 10월 7일에 강원도 춘천에서 전국체전 개막식이 열릴 예정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 예정이었다. 이들은 강릉에서 침투에서 춘천까지 낚시꾼으로 위장해 춘천까지 이동 예정이었고 총은 낚시 가방안에 은닉하려 했다. 

남한의 전국체전 10월7일~13일 기간은 북한의 창건일 10월 10일이었다.  당시 북한의 대남작전에 성과가 없었고 노동당 창건일에 맞춰 대남 공작을 성공함으로써 체면을 세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목적도 있었다. 수첩등에 여러 정보를 기록한 것이 확인되었다. 

 

49일간의 소탕 작전 

 

무장공비 14명을 잡기 위한 하루 평균 약 4만 3천명을 동원하며 역대급 수색 작전을 펼쳤다. 해.공군 등 여러 병력 참여, 육해공이 전방위적으로 밤낮없이 대규모 작전으로 총격전부터 자수 전단 살포 등의 심리전까지 펼쳤다.  1996년 9월 18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고 9월 30일까지 12일간 14명 11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다.  이때 수색에 가장 큰 도움을 줬던 것이 주민들의 신고였다. 

 

자수권고 전단지 내용
당시 살포했던 전단지로 숨어있는 무장공비들에게 자수를 권고하는 내용
전향한 간첩들의 모습이 담긴 안전보장 전단
전향한 간첩들의 모습이 담긴 안전보장 전단도 함께 살포

 

남은 무장공비 3명 추적작전

 

남은 공비는 3명이였다. 이후 36일간 잡은 무장공비는 0명이었다. 3명의 무장공비는 36일간 강원도 전 지역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군이 그들의 동선을 추적한 것이 이정도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무장공비 동선
무장공비는 산능선을 타고 하루에 수십KM 를 이동했으나 국군은 3KM 이동/ 무장공비 동선


무장공비 3명 중 한 명이 용평 스키장 매점에 들어가서 콜라, 사이다 훔쳐서 꺼내 먹고 오락실 들어가서 잠도 자고 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국군 전사자는 12명인데 그 중에 7명이 36일간 이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연화동 전투

그리고 마침내 무장공비 49일째 되던 날 최후의 교전이 벌어진다. '연화동 전투' 로 연화동 일대에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공비가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군사분계선 안쪽으로 모든 길을 차단을 해 놓은 상태였고 인제 연화동 인근 자연휴양림에 매복한 국군에 의해 무장공비 2명이 발각이 된다. 9월 18일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어느덧 11월 4일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무장공비 2명이 발각된 연화동 위치
무장공비 2명이 발각된 연화동 위치


국군이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암구호 대 !  자신은 3대대 선임하사라고 하며 태연하게 국군 행세를 한 무장공비들이었다. 그들은 북한에서 훈련 받은 남한 말투로 국군을 속이려 했다.  그러나 3대대는 이미 이동한 것을 알고 있던 매복조였고 2:2 대치 상황에서 총격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생포하거나 사살하지 못하고 공비들은 도망가게 된다. 

 

 

무장공비 소탕작전 종료

 

그 후에 다시 2명의 공비와 교전이 일어나게 되고 국군 3명 전사 14명이 다치게 된다. 이 총격전이 벌어진 3시간 후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무장공비를 발견하고 포복으로 무장 공비에게 접근한 후 20M 지점에서 투항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저항했고 이에 이들을 사살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끝으로 49일 만에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종료되었다. 1명은 끝내 행방불명이 되었고 군은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종료했다. 

 

강릉 무장공비 연화동 전투 군군 전사자 3명
강릉 무장공비 연화동 전투 군군 전사자 3명


강릉 무장공비 침투 작전 이후
이 사건으로 국군 전사자 12명 민간인 사망자 4명이 발생했다. 이후에 북한에서 만든 강릉 무장공비 사건 영상이 공개되면서 한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북한이 공개한 전사자 명단에는 전향한 이광수를 제외한 25명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행방불명 된 한명은?

리철진이 살아서 북한으로 복귀했다는 일화는 북한에도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실족사나 굶어 죽으면 영웅 칭호를 획득할 수 없다.  국군과 전투 중 사망해야 영웅 칭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흔적 없어 사라진 사람에게 (살아서 남측으로 전향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영웅칭호를 주지는 않는다. 비디오에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리철진이 명단에 나온 것으로 봐서 살아 돌아갔을 가능성, 그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시 강릉 무장공비였던 25명의 전사자 사진을 공개한 북한
당시 강릉 무장공비였던 25명의 전사자 사진을 공개한 북한
강릉 무장공비 중 행방불명 된 무장공비 리철진 모습
강릉 무장공비 중 행방불명 된 무장공비 리철진 모습

 

이후 사살된 24구 무장공비들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북한의 입장
현재까지도 북한은 강릉 무장공비 사건을 공해상에서 훈련 중 잠수함이 고장나 표류하다가 우연히 남쪽에 들어오게 된 간첩 공작원이 아닌 잠수함 좌초 사건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표를 하고 3개월 후 뜻밖의 사과 입장을 발표한다. 잠수함 침투사건을 처음으로 시인하고 외교적 용어인 유감 표현으로 사과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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