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1.21 사태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한국사회 미친 영향이 이렇게 많았다

by 365 ^^ 2021. 5. 18.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밤 청와대 인근에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총격전인 벌어진다. 31명 중 생포된 인물은 단 한 명으로 그가 바로 김신조이다.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하는 것이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남한 군. 경 민간인 포함 30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던 굉장히 큰 사건이었고 무엇보다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서울 중심부까지 침투했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던 사건이었다. 

 

김신조 인터뷰 모습
무장 간첩 31명 중 29명은 사망했고 1명을 북으로 탈주하고 김신조만 유일하게 투항.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한 북한 124군부대

 

1967년 4월에 창설된 부대로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부대이다. 오직 대남 침투를 위해 특수교육을 받은 2400명의 게릴라전 부대이다. 그중이 31명의 최정예 인원으로 미혼에 25세 미만의 사람을 뽑아 훈련시켰다. 

 

당시 미국 문서를 보면 남쪽이 북한을 공격한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으로 1966년 10월 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서울에 방한한 기간 동안 북한이 유엔군을 습격해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었다. 조사 결과 국군의 북한군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 당시는 남북 간의 갈등과 반목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1968년 1월 21일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 

 

북한은 일요일 밤이면 대통령은 무조건 관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인 1월 22는 대학교 입학시험날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져 있던 시기였기에 이날을 공작의 날로 선택했다. 

 

북한 무장공비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

 

당시 북한 공작원들은 한번 사격에 30발이 연사 가능한 PPS-43 기관 단총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에서 제작되었고 한국전쟁 때도 사용이 되었던 기관총이다. 추운 날씨에도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고 한방에 탱크를 폭발시킬 수 있는 RPG-43 대전차 수류탄과 F-1 수류탄 1200개의 좁쌀 파편이 들어 있는 것으로 자폭용 수류탄이다. 그리고 단도가 있다. 불을 피우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식량으로 오징어와 엿을 가져왔다. 

 

 

pps-43 기관단총 모습
무장공비 기관단총
무장공비 무기들 tt-33 권총 및 수류탄
무장공비들이 일이당 가지고 있던 무기들로 PPS-34는 30발 연발 기관단총과 TT권총 1인당 실탄 350여발, 수류탄 14개, 대전차 수류탄 2개까지 이들의 무기량은 남한의 1개 연대 (약 2천여명)과 붙을 수 있는 양이었다.

 

개성을 출발 파주 도착까지 발각되지 않았던 북한 특수원들은 눈이 쌓인 겨울 산을 군장 20KG를 메고 시속 12KM의 속도로 달려서 파주 삼봉산에 1968년 1월 19일 새벽에 도착한다. 거기서 산에 나무를 하러 왔던 우 씨 삼형제를 만나게 된다. 이 사람들은 북한 특수부대를 만난 유일한 민간인이다. 신고하지 않겠다는 우씨 형제를 풀어주고 살려 보냈지만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즉시 경찰서에 신고했다.

 

우씨 4형제
우씨 4형제

 

북안산에서 내려와 청와대를 향해 걷기 시작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은 3번의 검문을 받게 된다. 3번째 검문소에서 최규식 종로경찰 서장은 3발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찰들과의 교전으로 청와대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시내버스를 국군 지원 병력으로 착각해 북한 특수대원들은 버스에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도 던졌다. 그로 인해 이 버스에 탔던 민간인 4명이 사망한다. 

 

기사포함 4명 사망
기사포함 4명 사망

 

그 후에 무장간첩은 총격전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고 열흘간 북한 특수부대원 소탕 작전이 지속되었다. 

 

 

 

 

 

 

북악 하늘길  

북한산에 가면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당시 총격적으로 15발의 총탄을 맞은 소나무와 그 옆에는 호경암이라는 바위에는 50발 정도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1.21 사태 소나무
1.21 사태 소나무
호경암
호경암

이 당시 숨어있던 김신조는 아침 등산을 위해 올라온 등산객들의 '야호' 소리가 군대 돌격 구호인 줄로 알고 도망쳤다고 한다. 북한 특수부대가 레저문화를 몰랐던 것이다.

 

김신조 모습
투항후 제2의 인생을 살며 현 목사로 활동중인 김신조

북한 특수부대원 31명 중 29명 사살 및 자폭을 했으며 한 명을 북한으로 도주하고 김신조만 유일하게 투항하면서 북한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 사살된 북한특수부대원의 시신을 확인하는 김신조
(좌) 사살된 북한특수부대원의 시신을 확인하는 김신조 

 

북한의 반응은? 

 

북한은 이 사건에 대해 시신 회수를 거부하고 사건 일체를 북한은 부인을 한다. 북한은 남한의 자생적 혁명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들 29명의 시신이 북한으로 회수되지 않아 파주 적성면 답곡리에 묻혀 있다.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 간첩의 묘지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 간첩의 묘지

 

1.21 사태 배경 (북한이 무장간첩을 보낸 이유)

 

당시 북한은 소련, 중국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1965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협정을 체결한다. 이에 위기감을 갖게 된다. 당시 소련의 흐루쇼프는 서구 진영과 평화공존론을 주장하니 북한과 중국은 반발을 했고 1966년 중국은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 "김일성은 수정주의 독재자"라고 북한 체제를 비판하며 사회주의 체제가 와해되면서 북한은 고립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 미. 일은 공조 체제가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을 하고 있던 호찌민은 김일성(1958년)에게 파병 요청을 한다.  그러나 도와주지 못한 북한은 대신 도와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고 남한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어 더 이상 남한 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못하도록 간접지원을 약속한다.

북베트남에서 만난 호찌민과 김일성
북베트남에서 만난 호찌민과 김일성

 

미국은 그 당시 반전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증파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1968년 4월 18일 존슨 미 대통령은 호놀룰루 정상회담에서 한국군 추가 파병을 요청하지 안보가 불안한 남한도 추가 지원이 어려운 상태가 돼버리면서 북한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사건

 

그러나 북한은 이에 그치지 않고 1.21 사태 이틀 후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사건을 일으킨다. 북한은 미국의 해군 정찰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1명이 사망 83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북한에 피랍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TV로 전달된 베트남전의 참상으로 인한 반전 운동이 극에 달하고 있던 상황의 미국은 판문점에서 북한과 협상을 벌이고 북한의 요구는 " 북한의 영해 침범 사실 인정과 사과" 뿐이었다. 그리고 1968년 12월 23일 미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풀려난다.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요구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한 북한 측의 사과 요청을 미국은 자국의 협상 실패를 우려해 거절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보복 공격을 주장하자 미국은 특사 사이러스 밴스를 파견해 남한의 보복 공격을 차단하는 설득을 한다. 베트남전 수행 중인 미국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한반도 전쟁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단독으로 보복을 위해 684 부대(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 북한 124 군부대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 전투기 출동 계획까지 수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감시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1968년 4월에  실미도 부대가 창설이 되었고 '684부대'로 불리게 된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과 동일 인원으로 구성해 똑같은 훈련을 시켰다.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에게 받은 것

 

  • 무기 제조 권한 M16 소총 생산 공장을 한국에 허가
  • 군사원조 지원(브라운 각서 1633년 3월) 
  • 2억 5천만 달러의 경제 원조 지원

 

 

 

1.21 사태 여파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 모든 장병의 군 복무 기간이 6개월간 연장되면서 군 제대가 보류된다. 육군과 해병대 복무기간은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공군, 해군의 복무기간은 3년에서 3년 6개월로 연장이 된다. 10흘 동안 400km를 걷는 천리행군이 생겼고 유격훈련 5분 대기조 훈련이 생긴다. 
  • 자주국방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1968년 4월 1일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 (민간인들의 전투 훈련이 실시)
  • 학교에 실시된 교련 훈련(군사훈련): 남학생 모형총 총검술, 여학생은 구급교육
  • M16 소총 생산 공장을 설립 
  • 1968년 4월 27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종로에 세운다. (호국의식 강조)
  • 무엇보다 1.21 사태 이후에 사진, 주민등록번호, 지문까지 등록된 주민등록증 발급이 시작(간첩 색출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1호 주민등록 발급자, 2호 육영수 여사
  • 북악 스카이웨이가 생긴다.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조성된 도로로 세검정과 평창동 일대를 개발해 사람을 거주시켜 산악으로 들어오는 무장간첩을 막기 위한 생각)
  • 남. 북 최고 지도자들을 국가안보를 이유로 권력을 강화하게 되고 그 결과로 유신체제, 김일성 정권은 유일 지도자 체제를 갖추면서 1.21 사태의 끝은 독재권력의 강화로 마무리된다. 
  • 이전에는 휴전선이 나무목책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휴전선에 철색이 생겼다. 

 

[출처 역사저널 그날 276회]

 

 

 

김신조 사건 (김신조 루트, 근황)->선녀들 마스터 5회 

 

김신조 사건 (김신조 루트, 근황)

김신조 사건이란?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21에 일어난 사건으로 31명의 북한의 124 부대 무장 특수 부대원이 우리나라로 침투한다. 이들은 북한산 일대를 지나 서울 시내로 진입에 성공한다. 청

jangane.tistory.com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남북 역사상 최대규모)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남북 역사상 최대규모)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가 남한으로 침투한다. 무장공비의 인원은 남북 역사상 최대 규모인 무려 120명이 남한으로 침투한 사건이다. 북한 원산에서 울진 고포리

jangane.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