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북한 124부대가 청와대 기습작전을 위해 내려왔다 진압되자 남한은 보복을 위해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비밀리에 68년 4월에 실미도 부대(=684부대)를 탄생시켰다.
실미도 684부대 탄생 배경
당시 한반도에서의 전쟁 시 작전 지휘권은 유엔군 관할로 미국이 한반도의 군대를 통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식 군대 동원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의 눈을 피해 중앙정보부의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의 지휘 아래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긴급 소집해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보복 계획을 세우고 김형욱 부장이 먼저 북한 124부대와 유사한 특수부대 창설을 주장했다. 이렇게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실미도 부대 공작원 31명을 모집했다. 684부대의 작전명은 오소리의 습성처럼 먹이를 잡을 때 납작 엎드렸다가 급습하는 습성이 있어 오소리 작전이라 불렸다.
실미도 684부대 부대원 구성
북한 124부대를 뛰어넘을 최강부대를 만드는게 목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화에서 처럼 사형수나 무기수를 대상으로 물색 (이것은 또 다른 부대 선갑도부대의 스토리) 했다. 하지만 법무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공작원 선발 방향을 틀어 무연고자나 가족과 연락이 끊긴 민간인을 대상으로 실미도 부대 공작원 31명을 모집한다. 선발된 청년들의 직업은 20대의 행상, 운동선수, 요리사, 서커스 단원 등 다양 사회 비주류 청년들을 모아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실미도에 끌려간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로 가난하고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684부대를 훈련 시키기 위해 차출된 기간병들과 작전을 수행할 공작원 31명은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어 실미도로 들어오게 된다. 실제 어떤 작전인지 숨긴 채 민간인을 모은 이유는 갑자기 사라져도 문제가 없게끔 준비했고 문제가 생겨도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기 좋은 사람들도 모집했던 것이다. 영화 <실미도> 속 공작원 모집과정은 픽션이고 실상은 민간인들에게 자행된 일종의 국가 폭력이었다.
실미도 위치
인천 무의동에 위치한 무인도 실미도는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 바로 아래 위치해 있고 무의도와 연결되는 하루에 2번 6시간 정도 바닷길이 열린다. 무의도의 실미해수욕장이 실미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 실미해수욕장으로 이름 붙여졌다.영화 <실미도> 또한 실제로 실미도에서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고 한다.
훈련장으로 실미도를 선택한 이유는?
후보로 연평도, 우도 인근이 거론되었으나 북방한계선에 인접해 사격, 폭파 훈련 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탈락되었고 인천에서 뱃길로 16km 떨어진 외진 장소로 무의도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실미도를 선택했고 바닷길은 6시간 정도만 열려있어 외부와 단절, 감시에도 용이했던 지형이 실미도였기 때문이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 실미도에서 기간병과 공작원이 2달간 직접 막사와 시설을 직접 지었다. 군인들이 훈련하는 연병장 또한 산을 수직으로 깎아서 공간을 만들었고 무의도 반대편에 위치해 있어 실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완벽히 은폐된 곳이었다.
실미도 684부대 훈련 내용
훈련 내용은 4시 반에 기상에서 6km 산악구보를 시작으로 오전에 강도 높은 3시간의 훈련 후 점심 먹고 오후 훈련 저녁 후 3시간의 내무 교육 후 10시 취침하는 고된 훈련을 매일 반복했다.
산악구보는 북한의 124부대보다 더 빠른 행군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남한 실미도 부대는 1시간에 11km 주파하는 북한 124 부대를 넘어선 속도를 냈다고 한다. 훈련 목표를 달성을 위해 잔혹한 폭력까지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더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 기관총 사격으로 위협을 하고 골 정상은 흔했고 총상까지도 견뎌야 했다.
1년 6개월의 지옥 훈련 끝에 마침내 출정 명령이 떨어지고 1969년 10월 북한과 가까운 백령도로 이동 후 침투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비행기를 통해 가는 것은 발각 위험이 있어 열기구를 통해 침투할 생각으로 백령도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작전 대기 명령이 내려온다. 침투명령만 기다린던 그들은 다시 실미도로 돌아온다.
실미도 부대 작전이 취소된 이유
그 당시 서울의 상황은 684 실미도 부대를 창설한 김형욱 부장에서 김계원 부장으로 중앙 정보부장이 교체되었다. (김형욱 실종 사건 보기)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유신체제로 접어들어 국제관계의 상황에 순응하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무력 충돌은 불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제적인 상황 또한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 이후 냉전 체제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실미도 부대는 무작정 대기 상태로 있다가 1970년 박정희의 8.15 경축사 때 충격적 소식을 듣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8.15 평화통일 구상 선언을 발표하며 남북한 무력 행위를 중지하자는 평화선언을 먼저 제안 한 것이다. 이것은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상실하는 발표였다.
당시 국내외 상황 자세히 보기 ▼
7.4 남북 공동성명 의의 (최초의 남북 교류 배경 및 한계)
실미도 공작원 탈출
시간이 흐르면서 31명으로 시작한 684부대는 훈련 중 각종 사건, 사고와 하극상과 탈출 시도 등 총 7명의 공작원이 사망했고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무기한 속절없이 기다리게 되니 부대원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고 마침내 부대원들은 탈출을 결심한다. 1971년 8월 23일 새벽 6시 30분 684부대는 기간병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30여분의 총격전 끝에 기간병 18명 공작원 2명이 사망한다. 최종적으로 남은 22명의 684부 대원은 실미도에 온 지 3년 4개월 만에 섬을 탈출한다.
실미도 사건
그들은 배를 타고 섬을 나와 승객 6~8명이 타고 있는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하고 보고를 받은 육군은 버스를 조준 사격해 공작원들 3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군을 따돌린 나머지 공작원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그 과정에서 경찰들과 교전하게 되고 오후 2시쯤 대방동 일대로 이동한 공작원들을 향해 경찰은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고 버스는 가로수를 들이받아 그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8명의 공작원이었다. 작전 실패를 직감한 공작원 8명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1971년 8월 23일 오후 3시경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다.
실미도 사건의 결말
실미도 사건 684부대는 철저하게 은폐된다. 처음에는 '무장공비의 침투'라고 발표했다가 공군 관리하에 있는 특수범의 난동을 진압한 것이라고 발표를 번복하고 결국엔 684부대는 사형수, 무기수 집단으로 매도해 조작 발표를 했고 관련 서류를 일체 파기하기 시작했다. 684부대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했다.
당시에는 다양한 보도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사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생존자 4명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당시 상황을 은폐하려 했다. 공군 수사본부에서 축소수사, 은폐에 급급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공작원 4명 생존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어 1972년 3월 10일 결국 비밀리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시신은 암매장되었다.
이 실미도 사건을 공작원 22명 전원 사망, 민간인 6명 경찰관 2명 등이 사망했던 시가전이 있던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실미도 사건이 드러난 계기는?
이렇게 은폐되었던 실미도 사건이 세상이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영화 <실미도>였다. 영화가 천만 관객으로 흥행하자 실미도 부대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본격적으로 진상 조사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2005년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진다.
한국 근현대사 속 국가 공권력에 의한 비극적인 사건을 재조사는 기관이 만들어졌고 실미도 사건도 다뤄지면서 전체 실미도 공작원 중에 20구의 시신이 벽제 시립묘지에 가매장 후 방치된 것을 확인했지만 사형당한 공작원 4명의 유골은 현재까지도 어디에 매장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2005~2010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활동이 있었고 현재 2기가 활동 중이다.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민의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접할 때마다 "지겹다, 그만하자" 이런 얘기는 절대 하면 안 된다. 바로잡기 못한 역사는 되풀이되므로 국민이 잊지 않고 있어야 정부도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다.
김형욱 실종사건 , 전설의 중앙정보부장 살해 배경 및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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