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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첨성대 이야기 (용도, 천문대인 증거들)

by 짱신나^^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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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Cheomseongdae Asia's oldest astronomical observatory) 

국보 31호 첨성대 야경, 7세기 중반 선덕여왕(재위 AD 632~647)때 만들어짐

 

◈ 첨성대는 무엇을 하던 곳일까?


용도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다. 

 

1.별을 관측하던 곳

들어가기가 좁아 구멍 뚤린 곳으로 사다리를 이용해 들어간 후 올라가서 별을  볼수 있는 구조

2. 재단설

별을 관측하기엔 불편한 구조로 제사나 제물을 올리던 곳 

3. 복합 이용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AD 632~647)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왕권 강화였다. 당시 신라에만 존재하던 골품제도는 성골에서만 왕이 될 수 있는데 성골 남자의 대가 끊겼다. 유일한 성골 여자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여자가 왕이 된 적이 없던 상황이라 무시와 비하가 난무했었고 이에 선덕여왕의 가장 큰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곳으로 첨성대를 축조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 농업 사회로 날씨나 기상 관측이 매우 중요했고 이런 것들을 위해서는 제단,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종교적 힘을 빌리기도 했을 장소로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사용됐을 것이다. 

 

 

첨성대는 너무 유명한 문화유물이지만 유명세에 비해 실제 기록은 딱 한줄만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또한 첨성대의 관측방법은  첨성대에 들어가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지만 이 책의 시기는 1000년 후의 자료인 것이다.
첨성대 속 숫자 의미 Total Length 9.17m ,362 stones.

 

12의 의미는 12개월을 상징하고 12+12=24절기와 일치한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27단은 달의 공전주기 (27, 3일)와 일치 or 선덕여왕이 27대 왕이어서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 권력을 가진자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주의 섭리를 담은 한 첨성대의 무수한 얘기는 모두 추측일 뿐이다. 

 

 

◈ 첨성대가 천문대일 가능성에 대한 증거들 

 

▶천문대로서는 너무 작은 규모이다. 첨성대 중간의 남창구(남쪽으로 창이있음)로 들어간 후 위로 올라가 꼭대기에서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꼭대기의 작은 면적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데 첨성대와 비슷한 크기의 천문대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그래서 천문대의 크기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고려, 조선시대 천문대 모습

 

▶들어가는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들어가고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갈 때는 사다리를 이용하고 흙으로 채워진 첨성대 내부는 내부 수직 통로에 사다리를 걸친 흔적이 발견되었다. 당시 천문 관측은 중요하고 성스러운 행위로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했을 것이다. 

 

첨성대 내부

 

▶또한 천문대는 모두 산에 있는데 첨성대의 위치는 경주 평지 한복판에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수도 경주도 밤에 어둡기 때문에 굳이 산이 아니여도 천문 관측이 가능했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시기 전후를 중심으로 천문 관측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의 천문 관측 기록들은 세세한 내용까지 적혀있고 찰나의 순간에 없어지는 유성이 떨어지던 날짜 장소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문관측 기록들

 

당시 유성의 관측 지점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원의 형태로 이 원의 중심에는 첨성대가 위치해 있다. 그래서 첨성대에서 관측된 유성일 확률이 높은 상황이고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 달라진 관측 기록의 양이 10배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학계의 정설은 첨성대는 =천문대 로 알려져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신라시대의 문명은 당시 최고 수준의 문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동아시아 문명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그 중엔 신라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굳이 현대과학이라는 틀 안에 넣을 필요하는 없는 것이다. 정답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며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선마 7회 일부 리뷰]

 

 

일제강점기 시기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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