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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김형욱 실종사건 , 전설의 중앙정보부장 살해 배경 및 결론

by 365 ^^ 2021. 5. 27.

전설의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 실종사건 

 

김형욱은 제4대 중앙 정보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집권 기간 18년의 1/3 인 6년 3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장기 집권을 위해 악역을 도맡았던 그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권력의 명성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지 10년 1979년 10월 7일 파리 시내 카지노에서 목격한 것이 마지막으로 누구도 김형욱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김형욱은 생사불명 상태로 오랫동안 있다가 1991년에 법원의 실종 선고를 공식적으로 받게 되고 현재 법적으로 사망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의 최후를 본 목격자도 없고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김형욱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막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했던 인물이다. 중앙 정보부는 당시 박정희 정권을 지탱해주는 권력기관이었다. 김형욱이 중앙 정보부장을 맡은 후에는 중정(=중앙정보부)을 폭악적이고 폭력적으로 운영을 했다. 그는 사건 조작, 불법 연행, 고문을 일삼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남산에 있었는데 이곳은 공포의 공간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
남산 소릿길 터널 :  중앙정보부 취조실로 통한 84m 길이의 터널로 철문, 타자기, 물방울 등 소리로 당시 고문실 분위기를 재현한 터널이다. 소리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터널이다 .

 

김형욱 그는 누구인가?

 

김형욱은 5.16 쿠데타의 주동 세력으로 정치적으로 박정희와 함께 등장한다. 동기는 육사 8기 김종필이 있다. 김종필과 같은 엘리트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인물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김형욱의 단순, 무식함, 저돌적 추진력이 장점이 된다. 

 

1969년 박정희 정부가 3선 개헌을 추진할 때 야당뿐 아니라 공화당 여당에서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 했던 정치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김형욱은 김종필의 거점인 한국 국민복지 연구회 조직을 반국가단체로 낙인을 찍고 핵심 멤버를 잡아 고문하고 그 결과 김종필은 잠시 정계를 떠나게 된다. 또한 1969년 6월 20일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또한 김형욱의 작품이다.

 

 

 

 

 

 

 

 

다른 국회의원들의 사생활을 추적해 불륜, 금전 관계 등으로 협박, 국회에 도청기를 설치하여 국회의원의 정보, 약점 등을 수집해 공천, 선거에 악용하는 등 3선 개헌을 위한 정적 제거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3선 개헌이 이루어졌고 3선 개헌의 일등공신은 김형욱이 된다. 

 

 

그런데 삼선개헌 확정 3일 뒤 김형욱은 중앙 정보부장에서 해임된다. 김형욱은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김형욱 후임으로 5대 중앙 정보부장 김계원이 된다.  

 

 

김형욱 미국 망명 과정

김형욱은 해임 후 1971년 총선에서 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전직 2인자였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그보다 보복이 두려웠던 김형욱은 그동안 자신이 괴롭히고 고문했던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사과한다. 그런데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되면서 김형욱도 국회의원에서 내려오게 된다.  

 

유신 헌법 제40조에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신정우회를 만들지만 김형욱은 이 조직에서도 탈락하게 되면서 보복이 두려워 미국 망명을 하게 된다. 김형욱은 1973년 초부터 회수한 사채로 미국 뉴저지 알파인에 27만 불에 달하는 대저택을 구입해 미국에 정착한 김형욱은 화려한 생활을 이어간다. 

 

 

 

 

 

 

 

 

 

김형욱의 돈은 어디서 났을까? 

중앙 정보부장 당시 국가의 이권 관리는 김형욱이 직접 관리했다.  1960년대 차관 도입이 많았는데 차관 도입 시 중정에서는 정치자금 명목으로 약 30%를 가져갔고 대형 공사 낙찰받은 건설사에서 중정에 일정액을 상납하는 일도 빈번했다. 김형욱이 망명 당시 1500만~2000만 달러(현재 환율 200억 원 )를 소유하고 있었고 1977년 6월까지 친지 계좌를 이용해 한국 내 재산을 해외로 반출하고 있었다. 

 

 

김형욱 실종사건의 배경 

 

코리아게이트 (KOREAGATE 1976)

1976년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 관련 이슈가 연일 터진다. 한국 정부가 박동선이라는 로비스트를 통해 20여 명의 미국 의회 관료에게 수백만 불의 뇌물을 뿌린 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로비 목적은 주한미군의 감축, 철수 저지와 박정희 정권의 독재, 인권탄압 관련 미국 내 비판 여론 무마시킬 목적으로 미국의 국회의원을 상대로 실업가 박동선을 통해 뇌물을 공여한 것이다. 이 사건이 커지면서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김형욱이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할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워싱터 포스트 신문에 실린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특사를 보내 김형욱의 사면, 신변을 보장할 테니 귀국을 권유 아니면 미국을 떠나 제3 국 가서 생활할 것, 만약에 어쩔 수 없이 청문회를 나갔을 때 코리아게이트에 박정희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박정희 대통령의 사생활 문제는 말하지 말아라 등을 요구한다. 

 

 

이때 한국의 중앙 정보부장이 8대 김재규였고 취임 직후 첫 번째 임무가 바로 김형욱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회유에도 불구하고 청문회에 출석 박정희 정권에 불리한 얘기를 쏟아냈다.

 

미국 청문회 참석 모습 

 

코리아게이트 박동선은 자신이 조종했던 공작원이며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묵인하에 이후락 정보부장이 지시했다고 증언한다. 그런 행동에 박정희 정부는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 아래 3차례나 김형욱 관련 회의를 열었고 결국 1977년 12월 17일 반국가 행위자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해외로 도피, 망명해 귀국하지 않는 자를 반국가 행위자로 규정해 재산을 몰수, 1996년 위헌 결정)을 만든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김형욱은 첫 번째 청문회가 끝난 후부터 (1977년) 회고록 집필을 시작한다.  2년 3개월 동안 200자 원고지 5천 매 분량을 집필한다. 이 회고록에는 5.16 쿠데타, 정인숙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사건과 배경이 총망라되어 있다.  

 

김형욱 회고록 

   

김형욱의 회고록은 김형욱의 명을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김형욱이 회고록을 집필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특사를 보낸다.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 윤일균을 보낸다. 그는 1963년 김형욱이 중앙 정보부장 취임 당시 의전을 담당했던 인물로 고향도 같았다. 미국에 도착한 윤일균은 권총으로 협박했다가 또다시 설득하며 결국 회고록의 원고를 50만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입수해서 왔다. 

 

그러나 이 회고록은 1979년 4월 일본 군소 출판사를 통해 회고록 요약본이 출간된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형욱 살해 관련 여러 가지 설

 

국내로 압송 뒤 살해설 

김형욱을 실신시킨 상태에서 비행기 화물칸에 싣고 국내로 들어와  청와대 지하 사격장에서 박정희가 직접 총살 또는 차 지절이 총살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 현지 살해설

프랑스 한국 대사관 지하실에서 살해 , or 살인 청부업자 고용해 강에다 시신을 유기했다는 설이 있는데 프랑스 현지 살해 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살해 후 닭 모이 분쇄기로 시신을 처리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고 화제가 된 살해설로 2005년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 인물이 등장했고 수많은 언론이 현지 취재를 했는데 막상 프랑스 파리로 데려갔으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지 못해서 살해설만 무성한 김형욱의 최후이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조사 결과 

 

2004년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라고 부르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김대중 납치, KAL기 폭파, 동백림 사건 등 국가 정보기관이 개입된 과거사를 규명하는 조직이 김형욱 실종 사건을 7대 우선 사건으로 선정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로 입국한다. 입국 6일 뒤인 10월 7일 평소 친분이 있던 이상열 주불 공사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전화를 하고 2시간 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상열 공사는 이전부터 김형욱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사를 맡길 중앙정보부 연수생 한 명을 사전 포섭해 두고 외국인 친구 2명과 관용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한다.

 

김형욱과 이상열 공사는 약속 장소에서 만나 일행을 소개한 후 이상열 공사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김형욱과 일행은 관용차에 탑승하고 외곽 순환도로에 진입하자 뒷좌석에 앉아있던 외국인이 김형욱의 뒤통수를 가격해 실신시킨다. 실신한 김형욱을 끌어내려 숲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이들은 30분 뒤에 돌아왔다.  김형욱의 최후는 이상열 공사가 포섭한 연수생이 유일하다. 

 

 

그가 말한 김형욱의 최후

 "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이고 시체는 두껍게 쌓여 있는 낙엽으로 덮어버렸다 "
 -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보고서 중 - 

 

 

 

 

 

 

 

 

 

그러나 이 이야기는 외국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열 공사는 죽기 전까지 이 사건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김형욱 실종에 관련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의 결론이다. 근거가 된 중정 연수생의 증언을 보면 사건 후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과 만남을 가졌고 근무하고 싶은 곳을 물었고 자신의 부장 직속 기관으로 발령을 내줬다. 그리고 여동생 집에서 출퇴근한다고 하니 집을 마련해주겠다며 전화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렇게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는 김형욱 실종 사건에 중정이 개입, 살해한 것까지는 확실히 밝혀냈지만 핵심 관련자들은 핵심 내용 진술을 거부하여 확실하게 사건의 진실을 밝혀 내기 어려웠고 의문점으로 외국인 손에 김형욱의 최후를 맡긴 것과, 살해 과정. 시신을 중정에서 확인하지 않은 것, 시신을 처리할 때 대충 낙엽으로 덮고 마무리했다는 것 등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김형욱은 왜 파리로 갔을까? 

 

김형욱은 미국에서도 항상 권총을 소지하고 경호원도 고용하며 철저히 신변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유독 혼자 프랑스로 갈 때만 우울하고 무료해서 지병도 치료할 겸 파리로 간다고 주변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형욱의 파리행에 대해서는 내연 관계의 여배우가 유인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또한 그 여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또 다른 이유는 회고록을 포기하는 대가를 받으려고 갔다는 설만 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형욱 실종 사건의 결론

 

김형욱 실종 사건은 전직 중앙 정보 부장이 현재의 중정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사건의 중심에 중앙정보부가 있는 것으로 김형욱 사건에서 미스터리는 김형욱이 어떻게 죽었냐 하는 것 외에는 없다.  숨길게 많았던 독재자는 나라 안이든 밖이든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었고 그 정부의 부역자는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형욱 실종 사건은 미스터리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던 이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 

 

 

[출처 역사저널 그날 2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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