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3회 중]
전 세계 중 가장 핵 위기에 처한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특히 최근에 미국과 북한의 갈등 관계가 고조되고 있으며 핵을 보유하고 있는 두나라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 속의 핵 위협 뿐만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원자폭탄(핵무기,핵폭탄)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유대계 미국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미국으로 망명한 후 아인슈타인을 만나서 나치 독일의 핵개발 가능성(우라늄을 이용한 새로운 에너지 개발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고민 끝에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원자 폭탄 개발을 권유하게 된다.
이 폭탄은 단 한발만 터트리면 항구 전체와 주변 지역을 파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 single bomb of this type, carried by boat and exploded in a port, might very well destory the whole port together with some of the surrounding territory.
대통령께서 핵분열 연쇄 반응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In view of this situation you may think it desirable to have some permanent contact maintained between the Administration and the group of physicists working on chain reactions in America.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1939년 8월 시작으로 1940년 3월, 4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탄생한 것이 핵폭탄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편지가 그런 참혹한 결과가 나오라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고 자신의 편지가 핵개발의 시작점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런 편지를 쓴 것을 많이 후회했고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원자폭탄을 반대하는 반핵운동에 앞장서서 미국 정부의 핵 정책을 비판했다고 한다.
핵 폭탄은 언제 발명되었을까?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5회)
히로시마 원자폭탄 탄생 투하 배경 및 티니안 섬 속 원폭 적하장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편지와 무관하게 당시 영국에서는 일명 모드 프로젝트라 불리는 핵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공세가 강력해지자 나치 독일의 폭격 범위에 있던 영국은 동맹국인 미국에 핵개발 정보를 알려주지만 미국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핵개발에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
핵개발의 결정적 사건은 미국에 일본에게 미국 본토인 진주만을 습격을 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루스벨트가 1941년부터 본격적으로 맨해튼 프로젝트 핵 개발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맨하튼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만 해도 이런 엄청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으라고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연합국도 걱정했듯이 독일도 비밀리에 핵폭탄 프로젝트(우라늄 클럽)를 개시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미국은 극비에 프로젝트를 진행할 도시를 선정하고 지도에서 조차 도시 이름을 삭제시켜버렸다. 투입된 인원들은 신원조회가 필수, 서약서를 작성했다.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원만 최대 13만 명에 이른다.
로스앨러모스 도시에는 노벨상급의 과학자들이 모였고 이렇게 모인 과학자들이 놀라운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어 프로젝트 시작 후 3년 만에 (1945년) 리틀보이와 펫맨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핵폭탄을 사용하기 전에 한차례의 트리니티 실험을 1945년 7월에 진행한다. 실험에 사용된 폭탄은 플루토늄 폭탄이었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는 우라늄 폭탄 ,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 팻맨은 플로토늄 폭탄이었다.
안타깝게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 폭탄 리틀보이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고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또한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도 약 7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심지어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적당한 높에서 폭탄을 폭발시켜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계산까지 해서 사용했던 핵폭탄이었다.
핵폭탄을 실어 날랐던 조종사에게 실명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섬광을 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고 투하 즉시 '전속력으로 그 자리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한 진짜 이유
1945년 2월 미국&연합군은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을 부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은 항복했고 일본도 항복 직전의 상황이 되었는데 그제야 소련이 참전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미국은 전후 소련이 주도권을 쥘 것을 우려해 미국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려고 핵폭탄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핵폭탄 사용으로 미국이 비난을 받자 미국은 사상자를 최소화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입장 발표를 한다. 2차 세계 대전에 같은 편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 후에는 다시 사이가 벌어지면서 1945년 당시 전 세계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 미국은 전쟁 우위 국가로 자리 잡으려고 했다.
핵 보유국과 NPT
그러나 소련이 독자적인 핵 개발을 감행하게 되고 1949년에 핵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이렇게 소련도 핵을 보유하면서 다른 국가들도 핵 개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나중에는 1945~49년 영국,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이 핵을 개발하게 된다.
이후에 1969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금지조약을 체결한다. 이조약의 내용은 핵보유국은 더 이상 핵무기를 양도하지 않고 비보유국은 제조나 획득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993년 북한은 이조약에서 탈퇴 후 지속적으로 핵실험을 지금까지 강행하고 있다.
현재 NPT(핵 확산 금지조약)이 인정하는 핵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5개국)이고, NPT에 가입되지 않은 핵 보유국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NPT 탈퇴)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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