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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히로시마 원자폭탄 탄생 투하 배경 및 티니안 섬 속 원폭 적하장(45)

by 365 ^^ 2020. 8. 5.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5회]

 

오늘의 탐사지: 티니안 섬 원자폭탄 적하장
주제: 원자폭탄 탄생과 투하 배경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탄생 


1905년 을사늑약이 있던 해에 아인슈타인은 세계를 뒤흔든 논문을 발표한다. 그것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핵무기 탄생의 단초가 된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독인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이기 시작할 때 즈음 1933년에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독일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바탕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써서 원자폭탄의 위험성에 대해 알린다. 

 

 

그 후 루즈벨트는 원자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는 투입된 예산만 당시 돈으로 약 20억 달러에 이르렀다. 현재 가치로 약 30조 원에 달했다. 연간 12만 5천여 명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동원해서 결국 1945년 7월에 미국 뉴멕시코 주 사막에서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첫번째 핵, 더 가제트)

 

더 가제트(코드명)를 실험하기 위한 트리니티 테스트 

 

당시 핵 실험을 지켜본 과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막 한가운데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열감과 주변 수 킬러미터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목격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 오팬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든후  자책감에 빠졌다.

 

 

미국 내에서 원자폭탄 사용 여부를 두고 의견이 나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이미 일본 본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이었다. 또한 인명 피해가 엄청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사용하면 안된다는 의견이었지만 일본은 항복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일본은 이런 상황에 항복을 계속 미룬 이유는 조건부 항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천 황제를 유지 시켜주는 조건의 항복을 논의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무조건 항복을 원했고 일본이 교섭을 묵살하자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일본 어디에 떨어뜨릴 것인가?
도쿄 대 공습 이후 폭격된 곳이라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도쿄는 제외 시켰다. 그래서 멀쩡한 장소로 단 한번도 폭격이 되지 않은 곳으로 대규모 산업단지와 군수산업, 군사기지가 있던 히로시마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하게 된다.

원자폭탄 적하장

 

원자폭탄이 출발했던 곳 티니안 섬
첫번째 원자폭탄을 적재했던 곳

 

 

 
미사일이 없던 시절이라 폭격기에 직접 싣고 가서 투하했고 히로시마에서 약 7만명이 즉사했고 그 이후에도 1945년 말까지 10만 명이 넘게 사망하고 그 후로도 대대손손 수십만을 죽여갔다. 
 
 
 
 
 
 
첫번째 원자폭탄 '리틀보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이름은 로버트 서버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학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45년 8월6일 티니안 섬의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핵무기를 싣고 히로시마로 향한다. 그 뒤에 과학 관측, 사진 촬영용 항공기 비행기 두대가 촬영을 위해 함께 따라간다. 우리가 보는 영상들이 그때 이 비행기에서 찍은 영상들이다. 


출격 직전 찍은 군인들 사진을 보면 모두 웃고 있는다. 

 

그들은 몰랐다. 히로시마로 향하는 그것이 원자폭탄인지 그저 최신 폭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부대장만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원자폭탄의 마지막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히로시마를 보니 오전 8시 출근시간 전경이 뚜렷하게 보였다.

 

미군 전투기 출몰에 공습 사이렌이 울렸으나 비행기가 한두 대만 보이자 정찰 임무라 생각하고 사이렌이 금방 멈췄다. 그래서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생존자들은 그날의 전투기 위치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그곳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마침내 히로시마에 떨어지고 세상을 삼키는 버섯 구름이 피어오르며 세상을 집어 삼켰다. 

 

일본인들은 그날의 기억을 번쩍, 쾅으로 기억한다고 ...

 




원자폭탄의 위력 

직접 쳐다본 사람들은 실명 되거나 안구가 녹고 번쩍 해서 손으로 가렸는데 뼈가 보이더라

원자폭탄의 위력 

 

태양보다 밝은 죽음의 섬광 500m 반경의 물체는 모두 증발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죽어 갔고 그 지역은 통째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히로시마 원자폭탄은 모든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히로시마에 가면 어떤 병사가 앉아서 쉬다가 폭탄을 맞고 그 자체로 증발한 사진, 
신체조직 일부가 돌계단에 묻어있는 사진으로 폭탄의 위력이 단번에 느껴지는 흔적이다.   
원자폭탄 투하 직후 엄청난 굉음 충격파

 

4000도까지 치솟는 온도로 인해 모든 생명체 증발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수천도씨로 치솟는 온도 때문에  생명체는 거의 증발해버리고 그 후에 엄청난 폭풍우가 발생하는데 사람 고막이 터질 정도로 엄청난 충격파와 굉음이 함께 확산되기 시작한다. 

 

최악의 살상무기 원자폭탄의 위력

 

가스를 들여 마시신 사람은 잇몸이 떨어지고 머리가 빠져있었고 직접 눈에 맞은 사람은 눈이 튀어나와 있었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생존자 이수용 할머니 증언 중- 

 

단 1발의 폭탄으로 사라진 히로시마 1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자폭탄의 위력이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항복하지 않는다. 이유는? 
일본이 항복을 미룬 이유는 일왕을 비롯한 일본 군부는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발의 원폭의 위력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일본이 별 반응이 없자 3일뒤 미국은 다시 한번 원폭 투하를 결정한다.

 

두번째 원자폭탄 '팻맨'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의 별명을 따서 지음

 

일본의 고쿠라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발 기상 악화로 시야 확보가 어려워지자 나가사키로 변경 8월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팻맨'은 순식간에 7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즉사 시키고 더욱 무서운건 방사능 노출로 인한 2차 피해였다. 

 

 

 

일본은 가해국 전범국이면서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고 주장하지만 조선인 원폭 피해자도 상당했다. 정확한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한인 피폭 피해자만 7만여 명에 사망자는 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한인 피해자를 1만명 정도로 축소 발표했다. 

 

나가사키에 조선인 피해자가 많았던 이유는 이곳은 군수 공업단지와 미쓰비시 중공업등의 군사 기지 관련 항만 시설,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군수공장등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가 많이 있었다. 게다가 일본은 한인들을 한곳에 모여 살게 했기 때문에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원자폭탄 2발을 맞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북마리아나제도 티니안은 현재 미국 자치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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