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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친일파 배정자, 설탕왕 마쓰에 하루지의 남양흥발주식회사 (44)

by 짱신나^^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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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4회]


오늘의 탐사지: 사이판 (슈가킹 공원 -찰란카누아(=찰란카노아) 해변-비치로드)

주제: 사이판 한인 노동자의 눈물
출연자: 설민석 



슈가킹 공원

한국인 보다 일본인이 많이 찾는 슈가킹 공원

사이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신사  



일본의 침략 전쟁 당시 일본의 민낯 내부적이 모습과 산업 전반적인 상황과 나라를 잃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아본다. 


설탕을 운반하는 기관차


설탕은 일본에게 에너지원이자 중요한 군수 물자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1914년 사이판을 지배하게 된 일본은 이곳에서 처음 시작한 사탕수수 사업이 성공적이었다. 남양군도를 장기 통치하기 위해 주목한 것이 바로 제당업이었다. 

 설탕왕 마쓰에 하루지

  


1934년에 세워진 설탕왕의 동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만들 정도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고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세워졌지만 동상이 훼손되지 않았다. 

1876년 생 김구 선생과 동갑인 설탕왕은 제당 회사에 취직 후 미국의 제당 기술을 일본에 도입하고 일본에 최초로 각설탕을 선보인 장본인이다.그를 설탕왕으로 만든 남양흥발 주식회사는 사이판에서 엄청난 양의 설탕을 생산하게 된다. 



남양 흥발 주식회사 

1921년 일본 정부와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남양흥발 주식회사를 창업했는데 이때 마쓰에 하루지가 최고 경영자로 참여한다. 1923년 본사를 사이판으로 옮기고 제당 공장을 건설한다. 이때 얻은 별명이 바로 설탕왕이다

북만철 남흥발이라 말이있다. 일본의 북쪽에는 남 만주 철도 주식회사가 있고 바다에는 마쓰에 하루지의 남양 흥발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일본의 해외침략 및 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한 양대 회사였다. 
대표적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가 있고 또한 남양흥발이 전범 기업으로 분류된다. 

사이판 전투가 있던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지역 정보 제공은 물론 사이판의 수많은 군사 시설을 만드는데 회사의 노동자들을 제공하고 일제의 침략 전쟁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했던 남양 흥발의 설탕왕이다. 

찰란카노아 해변

1917년 일제의 공고문에 속아 사이판에 도착한 90명의 한인들이 가장 먼저 밟은 땅이 바로 찰란카노아 해변이다. 당시 그들은 상륙한 부두는 지금도 현지에서 '설탕 부두'라고 불리고 있다.

마쓰에 하루지의 전범 행적

조선 수탈의 상징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자금을 받기도 했었던 민간기업의 탈을 쓴 전범 기업이 남양흥발이다.

한인이 없는 다른 농장은 남자는 7시간 여자는 3시간만 노동
한인만 남녀 상관없이 섭씨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무조건 10시간 노동을 시킴

세부류의 노동자들 
  • 오키나와인들-당시 상대적으로 왜소했던 사람들, 그들은 세밀한 잡일 업무를 담당했고
  • 한인들 -동양권 중에선 체구가 큰편이었던 우리는 주로 힘을 쓰는 업무 중노동을 했다. 
  • 일본 본토인들은 나머지 업무를 담당

하지만 급여는 출신지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어 있었다. 

  •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은 45엔 40엔 일정금액으로 월급을 받고 
  • 한인들은 월급이 아닌 일당으로 65전 ->1엔 이하 
  •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일본인 월급의 절반 정도도 안되는 금액.
한인들이 집단 항의를 하자 사이판에 들어온 지 3년 만인 1920년 대거 해고되어 본국으로 돌아간 한인들 중 당시 남은 일부 한인들이 사이판 교민1세대들이다.   

국가총동원법 (1938년)

식민지로 얻은 땀과 노동력을 발판 삼아 제국주의 침략을 멈추지 않던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이 심화되면서 인적.물적 자원 모든 것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은 1938년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착취를 위해 제정.공포한 법으로 전시 상황이니 명령 집행 없이 의회 통과 없이 물자 인적 자원을 모두 공출할수 있다.는 법으로

 이 법에 따라서 강제 동원, 징병,징용등을 강행했다. 사이판에도 징용으로 한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국가총동원법 이전에는 700여 명 정도였던 한인들이 이후에는 5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1939년)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이어 1939년 7월28일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 이 발령되고 약 85000명의 한국인이 일본 땅 각지에 강제 동원 그 중 수많은 한인들은 남양 군도의 작은 여러 섬으로 동원된다.


남양군도 안에 위치한 축섬과 나우루섬으로도 강제 동원 된 한인들
하루에 배급하는 쌀의 양이 고작 작은 성냥갑을 채울 정도였고 그것마저도 배급 날짜를 점점 미루더니 나중엔 아예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너무 배가 고팠던 노동자들은 나무껍질, 도마뱀, 들쥐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그렇게 강제 징용으로  병들어 죽고 배고파서 죽고 가다가 죽고 배에서도 죽고 전쟁의 막바지에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한인들은 군사 기밀 유지등의 이유로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한 채 머나먼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친일파 배정자
 
이토히로부미의 양녀로 아버지는 1873년 대원군 실각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실명을 했다. 그녀가 3세 때 벌어졌던 비극적 가정사 이후 1885년 15세가 되던 해 일본인 밀정 마쓰오의 도움으로 일본을 건너 간다. 거기서 일본에 망명해있던 개화파 인사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김옥균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소개 시켜 준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된다. 

배정자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를 하녀 겸 양녀로 삼고 '다야마 사다코' 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준다. 그 후 우두머리급 친일파가 된다. 광복 후 반 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잡혀 온 여성 피의사 6명 중 가장 먼저 체포되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첫번째 임무는?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로 부임한 하야시의 통역이었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으로 조선 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입된 친일파 배정자였다.  

드라마, 영화의 소재가 된 배정자

드라마 각시탈에서 한채아가 연기한 홍주 역할


배정자는 70세의 노구에도 친일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에 개입해 한인 여성 백 여명을 군인위문대 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간 배정자였다. 

조선 여성에게 위안부 노릇을 강요한 대가로 금품을 챙겼던 배정자였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그녀는 "따끈한 장 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애걸하며 결국 뒤늦게 자신의 죄를 후회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일본은 위안부를 부인하고 있고 공론화 되지 않다가 1975년 배봉기 할머니 이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목소리들이 그 후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촉구하며 매주 수요일 열리는 수요집회을 열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29년 동안 외면하고 있다. 


전쟁후 일본군인을 심문해서 만든 지도에 위안소가 명확히 표시 되어있다. 

일본군이 주둔한 거의 모든 곳에 있었던 위안소가 있었지만 주변 주민과 증인의 증언만 있고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 일본정부는 위안소 운영을 부인하며 개인업자들의 소행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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