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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베를린 장벽 붕괴 이유 (결정적 계기) , 체크포인트 찰리

by 365 ^^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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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분단의 배경 

 

동독과 서독은 1940년대 말(1949년)에 분단이 된다. 1939년 9월 ~1945년 8월 독일 나치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결과 얄타회담을 통해 연합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점령되고 서독(미국, 영국, 프랑스:1949년 관할) 자본주의 독일과 공산주의 동독(소련관할 :1946년 )으로 나뉜다.

 

좌)전체 독일 분할점령 모습과 빨강 동그라미 베를린 위치 (우) 베를린 분할점령 모습
(좌)전체 독일 분할점령 모습과 빨강 동그라미 베를린 위치  (우) 베를린 분할점령 모습 

 

독일 전체가 미,영,프,소 관할 4분할 되고 소련 영역에 속해 있던 수도 베를린은 한 나라의 수도인데 한나라의 관할에만 둘수 없다는 것에 찬성해 4개국이 나눠서 관할하게 되면서 동베를린(소련 관할)과 서베를린(미국,영국,프랑스 관할)으로 나뉘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유

 

동독, 서독 경제 격차 심화 이유

처음에는 동베를린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주의 이상을 품었지만 서독과 경제적으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베를린 분할된 때 옛 소련이 점령한 동부 독일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모두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아서 빨리 경제 회복을 하게 되지만 동독에서 약 1000개의 공장이 문을 닫을 만큼 엄청나게 실업이 확산되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독일 시민 굶주림으로 시위
독일 시민 굶주림으로 시위

 

동독에 있는 공장들이 강제로 문을 닫은 이유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소련이었다. 독일은 후퇴하면서 소련의 공장들을 파괴해서 전쟁 피해 보상금으로 동독 공장 설비를 뜯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1000개 공장의 설비가 동독에서 소련으로 옮겨 갔고 약 1만 km의 철도와 기차까지 뜯어갔다.  동,서독은 원래도 경제적 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이런 이유로 격차가 심화되어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독 시민 탈주 현상

그리하여 실업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동독 시민들이 1940년대 말부터 1961년까지 동독 시민 중에 250 만여 명이 서독으로 탈주한다. 그래서 동독은 사회주의 체제 탈주자의 탈출을 막기 위해 1961년 동독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베를린 장벽이다.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으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으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

1961년 8월13일 베를린 한가운데 냉전의 상징이자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40킬로 미터 담장이 세워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통제로 이산가족이 늘어나고 동독은 더 감시를 심하게 하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 총 길이 155km 동,서 베를린 시내 세워진 벽
베를린 장벽 총 길이 155km  동,서 베를린 시내 세워진 벽은 40km에 달하고 302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낙후된 동독은 1980년대 경제상황이 최악이 이른다. 실업률 0%의 완전고용을 자랑했지만 임금은 턱없이 낮아 월급으로는 tv 하나 사기 힘들었다. 

 

 

부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가장 메인 검문소 중의 하나였다. 원래 이 문은 동서를 이어주는 문이자 검문소가 있던 자리로 만남의 장소였다. 이 검문소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왕래가 허용되었다.

 

부란덴부르크 문
부란덴부르크 문

약 30년간 굳건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철의 장벽을 넘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었고 약 5000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급기야 1989년 동독 주민 약 35만 명의 대규모 탈출사태가 일어난다. 

 

현재 베를린 장벽의 흔적
현재 베를린 장벽의 흔적

 

체크포인트 찰리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서 베를린 경계에 있던 검문소로 한때 이곳은 소련군과 미군의 탱크가 배치했을 정도로 검문이 삼엄한 곳이다 이곳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철거됐다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다시 복원을 했다. 현재 이곳은 베를린 대표 포토스팟이다. 

동서 베를린 경계에 위치했던 체크포인트 찰리
동서 베를린 경계에 위치했던 체크포인트 찰리
외국인만 지나갈 수 있는 검문소로 무장한 군인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외국인만 지나갈 수 있는 검문소로 무장한 군인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철거된 체크포인트 찰리
철거된 체크포인트 찰리

 

이곳 체크포인트 찰리에서는 페터 페히터라는 동독의 한 청년이 서독의 있는 자신의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서 서독의 사는 친누나를 만나기 위해 검문소를 몰래 통과하려고 했으나 베를린 장벽이 높이가 있어 친구와 함께 장벽을 넘기로 했다.

 

페터 페히터
페터 페히터

친구는 장벽을 먼저 넘었고 페히터가 장벽을 넘으려는 순간 동독의 군인들이 발포를 했다. 페이터는 총을 맞고 동독의 장벽 쪽으로 떨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동독 군인들은 가만히 이를 지켜만 보고 있던 모습을 반대편 서독 주민들도 어쩔 수 없이 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1시간 동안 피를 흘리고 방치된 18살의 페터 페이터
이렇게 1시간 동안 피를 흘리고 방치된 18살의 페터 페이터

이렇게 1시간 동안 피를 흘리고 누워 있던 청년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던 와중에 서서히 죽어간 페터 페히터의 나이가 고작 18 살이었다. 분단이 초래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죽음을 맞은 페터 페히터
죽음을 맞은 페터 페히터

이 청년의 죽음으로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했고 이것이 독일 통일의 촉매제가 된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

 

 

 

독일 통일의 결정적 계기 

1989년 체제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독의 한 교회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한달 후 7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자유와 기본적인 인권을 요구하는 시위는 점점 다른 지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는 약 1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며 자유를 외쳤다. 그로부터 5일 후 성난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동독 정부는 급하게  여행 자유화 정책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공산당 대변인은 역사적인 말 실수를 하고 만다. 

 

그때 한 기자가 질문을 한다.

 

 

"지금부터 바로 시행됩니다"

 

새로운 여행법을 숙지하지 못해 지금 바로 시행된다고 발표를 했던 것이다. 이에 전세계 뉴스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속보가 쏟아지고 국경 개방 소식에 동베를린 시민들은 달려 나온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국경수비대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발표 실수라는 사실에 시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결국 국경 수비대가 국경을 개방했고 동베를린 시민은 자유롭게 서독으로 향했고 서독 주민들도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심지어 양쪽 시민들이 장벽을 부수기 시작하고 이에 중장비까지 동원해 공식 철거를 하게 되면서 30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열리게 된다. 그 이후 동독 체제는 자유화와 더불어 급하게 붕괴되기 시작한다. 일 년 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선포한다.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통일 이후 

 

독일은 통일 후에 막대한 통일 비용을 치른다. 초기에는 서독 주민이 통일세를 부담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방비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여러가지 인프라 구축이며 군역의 의무도 폐지되고 여러 가지 큰 혜택을 갖게 되었다. 

 

2005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 장벽이 20여 개에 불과했지만 최근 들어 장벽이 70여 개로 늘어났다.  

 

국가간의 장벽들 미국 멕시코국가간의 장벽들 사우디 이라크국가간의 장벽들 헝가리 세르비아
국가간의 장벽들

 

국가간의 분쟁이 날로 심화되는 요즘이다 이제 우리의 장벽을 허무는 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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