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을사오적의 주도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니 고종은 일본의 불법 점령에 대한 부당함을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 헤이그 특사 파견의 정보를 준 것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였다.
고종은 어떻게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게 되었나?
조선의 황제 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긴밀한 관계였다. 니콜라이 2세 때 러일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고종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와 조선의 공공의 적이었고 여러 번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한 특별한 관계였다. 사실상 둘 다 마지막 황제였다. 동병상련?
1905년 8월 22일 을사늑약(1905년 11월) 3개월 전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낸다.
우리는 수 차례에 거쳐 독립 국가임을 표했습니다. 지금 일본의 군림은 불법입니다. 2000만 대한제국의 국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공사를 빨리 파견해 주시기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 |
고종은 당시 절박한 조선의 상황을 러시아가 세계에 알려주기를 원했다. 강제로 체결당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타국에 눈물로 호소라는 표현을 하면서 보낸 친서는 정말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직후였기에 러시아는 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콜라이 2세에게 초청장이 온다. 네덜란드 '해아(=헤이그)' 라는 도시에 만국평화 회의가 열리고 여기에 전 세계 대표들이 참석하니 대한 제국에서 특사를 파견해서 일본의 불법 점령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면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냐는 내용과 함께 초청장이 온 것이다.
니콜라이 2세가 고종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공공의 적 일본을 저지할 기회를 고종에게 준것이다. 이에 고종은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다가 을사늑약 체결되자마자 자신의 관직을 버리고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린 뒤 북간도로 넘어가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 중이던 이상설이 떠올랐다.
헤이그 특사
이에 고종은 이상설 선생에게 친서를 보낸다. 이상설은 고종의 명을 받고 가는 중간에 시베리아 열차에서 이준, 이위종을 만나라는 내용이었다.
북간도에서 망명 생활하는데 황제에서 친서가 왔다. 이준 열사는 검사 출신이고 이위종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로 외교관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그들은 ‘ 조국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극이 찾아온다. 이준은 명석한 두뇌와 반대 상소를 몇 번이나 올린 사람인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서 갔다가 갑자기 돌연 사망을 한다.
헤이그 특사로 조선에서 8500KM나 떨어진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당한 것이다.
*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 1907년 2차례에 걸쳐 1차 26개국, 2차 44개국 대표가 중립국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군비축소와 평화유지에 대한 협의를 했던 국제회의, 헤이그 특사 사겠는 2차 회의 때 일어났다.
이에 회의장 밖에서 청원서 배포하고 '한국의 호소'를 연설해 세계언론이 보도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일본 특사단은 이를 일본에 알리고 국내에서는 '공식적으로 특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강제로 고종한테 쓰게 한다. 또한 당시 일본과 영국의 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영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헤이그 특사 그 이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3인은 그 이후에 국내로 들어올수가 없었다.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 직후 순국했고 일본은 이상설과 이준을 당사자 없는 재판을 열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이상설
헤이그특사 이후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해외 순방을 하였으며 최재형 선생과 13도의 군을 창성 및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등 굉장히 많은 독립 활동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1917년 사망했다.
이준
이준의 죽음은 사명을 이루지 못한 아마 울분의 화병으로 1907년 7월 14일에 돌아가셨다는 추측이 있다. 울분과 화병으로 49세에 돌아가시고 유해를 55년만에 1963년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준 열사 박물관 홈페이지: www.yijunpeacemuseum.org)
이위종
이위종은 러시아와 여성과 결혼하고 그 이후 러시아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까지만 있고 그 이후의 기록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렸을 때부터 언어 천재였던 이위종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1906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고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까지의 기록만 있고 1924년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
목표를 성공해서 이바지한 사람의 기록은 남겨졌지만 실패한 사람에 대해서는 역사가 친절히 남기지는 않는 슬픈 현실속에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하고 그 이후에 국권 피탈까지 당하고 만다. (1910년 8월 29일)
<선녀들 13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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